젖지 않는 글자들
옛날, 아주 먼 곳에
종이월급 나라가 있었다.
그곳에서 사람의 가치는
오직 종이 두께로만 정해졌다.
달마다 종이를 나눠주는 날이면
사람들은 광장에 줄을 섰다.
누군가는 벽돌만큼 두껍고 무거운 종이를 품에 안았고,
누군가는 바람만 불어도 날아가 버릴 듯
얇은 종이 한 장을 겨우 쥐었다.
두꺼운 종이를 가진 자들은 목소리가 커졌다.
그들의 웃음은 거리에서 더 크게 울렸고,
그들의 말은 회의에서 곧 법이 되었다.
반대로 얇은 종이를 가진 이들의 목소리는
바람에 흩날렸다.
사람들은 듣지 않았고,
그들은 결국 자기 말마저 믿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마을 끝자락에는
낡은 인쇄소가 있었다.
그곳의 주인은 늘 얇은 종이 한 장을 품에 넣고 다녔다.
그 종이에는 빛나는 재산도, 권력도 적히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하루의 빛깔을 적고,
사소한 웃음을 기록하고,
지나간 눈물을 새겼다.
“종이는 두께가 아니라,
담긴 것이 무게를 만든다.”
그가 중얼거릴 때마다 사람들은 비웃었다.
“얇은 종이로는 아무도 널 기억하지 못할 거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펜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 해, 폭풍우가 몰아쳤다.
바람은 세상을 찢어발기듯 불었고,
비는 사람들의 두꺼운 종이를 덮쳤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랑이던 종이 묶음은
진흙 속에서 뭉개져 풀어지고,
그토록 힘 있던 목소리들은
젖은 종잇죽처럼 쓸쓸히 흘러내렸다.
사람들은 종이를 껴안고 울부짖었지만,
손에 남은 건 흘러내리는 덩어리뿐이었다.
그 순간, 거리에는
공포와 침묵만이 남았다.
그때 홀로 살아남은 건
인쇄소 주인의 얇은 종이였다.
비에 젖어도 글씨는 흐려지지 않았다.
그 위에는 그의 하루와,
그가 만난 얼굴들,
그리고 오래된 희망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종이를 바라봤다.
“왜 저 종이만 남아 있지?”
“어째서 저건 사라지지 않지?”
주인은 종이를 펼쳐 보였다.
그 순간, 사람들의 눈에
자신들이 미처 기억하지 못한 웃음과 눈물,
희망과 두려움이 비쳤다.
그제야 사람들은 깨달았다.
가치를 정하던 건 두께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살아온 흔적이라는 것을.
그날 이후, 사람들은 조금 달라졌다.
누군가는 아이의 웃음을 종이에 적었고,
누군가는 오래된 사랑의 이름을 써 내려갔고,
또 누군가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기록했다.
광장에 모여 종이를 나누는 의식은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았다.
종이의 두께가 아니라,
각자가 살아온 삶이
사람의 목소리를 만들어 주었으니까.
지금도 그 나라의 바람은
어른들의 귓가에 속삭인다.
“종이의 두께가 아니라,
네가 살아낸 무게가 너를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