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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으로 쓰나미를 만날 줄이야

-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by Cha향기

▮ 마침내 아들의 금식이 끝났다.

지금까지 아들은 아침, 점심, 저녁으로 각각 400ml/400ml/500ml씩 경관 영양식을 먹으며 지내왔다. 주치의가 처방한 식사량은 더 많았지만 최소한으로 줄여서 먹인다. 와상환자는 운동량이 적기 때문에 처방대로 먹였다가는 비만을 면키 어렵다. 살이 찌면 각종 성인병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맘을 다잡고 아들의 식사량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먹였다. 아들은 항상 배고프다고 하소연하는 것 같았다.


조금씩만 주던 식사마저 끊고 금식하며 이틀을 보냈다. 여러 가지 검사를 위해서 금식이 필요했던 것 같다. 드디어 한 끼에 200ml 캔이 공급되었다. 우유 한 잔 정도의 양이다.


"이거 어떻게 데우나요?"라고 영양팀에게 물어봤다.

"이 병원에서는 모두가 그냥 그대로 줍니다."

'그런다고? 환자에게 찬 것을 그대로 먹인다고?' 기가 막혔다.


아들이 지내는 본가 뒷베란다에는 살균 소독기와 온장고가 있다. 양치 용품, 가위, 목관 튜브, 석션 컵 등등은 항상 살균소독기로 소독한다. 그리고 아들의 매끼 식사와 보리찻물은 온장고에 넣어둔다. 사람이 따뜻한 것을 먹고 나면 온몸이 훈훈해진다. 찬 것을 먹고 나면 확 추워지는 법이다. 그런데 엄동설한에 차디찬 캔에서 따라낸 케어푸드를 그대로 환자에게 먹인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 아들이 푹잠을 잤다.

겨우 200ml였지만 뱃속에 그것이 들어가니 살 것 같았는지 아들이 입을 벌리고 잤다. 침대를 올려도 자고, 소변을 갈아 줘도 잤다. 아들은 내리다리 잤다. 그날 밤은 통잠을 잤다. 아들은 밀린 잠을 다 자는 모양이었다. 잠을 푹 자니 소변도 자주 누지 않았다. 새벽녘에 한꺼번에 눈 아들의 소변을 계량하니 700cc나 됐다.


다시 창밖의 산이 보이기 시작했고 잔설이 남은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도 보였다. 조만간 퇴원 오더가 떨어질 것 같았다. 아침 회진이 끝난 후에 가벼운 맘으로 편의점에 가서 디카페인 커피를 샀다. 그동안 쌓인 피로가 다 사라지는 듯했다. 간병에는 커피만 한 회복제도 없을 것 같다. 커피 한 모금, 한 모금이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 산소 공급기 튜빙을 뗐다.

석션 가래통의 색깔이 점점 옅어졌다.


"가래에 피가 많이 줄었네요." 석션을 하러 온 간호사마다 약속이나 한 듯이 같은 말을 했다.


치료가 잘 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목관에 세팅되었던 튜빙 호스가 해체됐다. 그것만 없어도 훨씬 수월했다. 의학 기술이 대단했다. 보이지 않는 염증을 혈액을 통해 알아내고 적절한 약으로 치료해 나간다는 게 신기했다. CT나 엑스레이를 찍으러 간다며 아들이 침대 채로 끌려나갔다가 돌아오곤 했다. 계속 뭔가 좋아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렇게 치료를 잘 받고 조만간 퇴원하면 될 것이라고 여겼다.


▮ 송구영신으로 모두가 설레던 때였다.

병원 안에서는, 대통령의 탄핵 심판 과정이나 무안 공항 비행기 사고와 같이 크나큰 뉴스도 제대로 모르고 지나갈 수밖에 없다. 그냥 딴 세상이다. 그래도 한 해가 저물고 새해로 넘어간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병원 복도가 분주했다. 낯선 기사들이 어슬렁거렸다. 새해 첫날부터는 '간호사실 B'가 '간호사실 C'와 양분되는 모양이었다. 기사들이 병실에 들어와서 비상벨 성능을 체크하고 간호사실에 있던 여러 가지 의료용품이 새로 마련된 '간호사실 C'로 이동되고 있었다. 하필 우리 병실이 '간호사실 B' 팀에서 '간호사실 C' 소속이 된 모양이다. 그날부터는 담당 간호사를 만나러 가려면 서편 복도까지 가야 했다. 딱 하루 사이인데도 그런 게 확 바뀌었다.


하필, 송구영신을 그렇게 부산하게 보내고 있었다. 휴대폰의 SNS에서는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메시지가 수없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나는 읽씹 할 수밖에 없었다.


▮ 이런 변을 봤나?

집에서 케어하는 동안에 아들은 사흘에 한 번씩 규칙적으로 응가를 했다. 일지에 응가한 날과 양을 적어둔다. 그 일지를 보고 응가할 날에 맞추어 뉘었다. 나는 아들의 응가 전담 처리사였다. 활보쌤들이 아들의 응가를 처리하지 않게 하려고 항상 신경 썼다. 아들이 응가할 동안에 활보쌤은 거실에서 쉬게 했다. 아들도 그게 맘 편할 것 같았다.


때에 맞추어 응가 체위를 해두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응가 치울 일을 당한다면 난감할 것이다. 아들의 응가 상태는 늘 양호했다. 그러니 치우는 일도 간단했다. 응가는 촌수를 가린다고 했던가? 아무튼, 아들의 식사가 경관 영양식이라 우유를 먹인 아기 응가와 흡사했다.


그날은 아들의 응가 디데이가 이미 지난 후였다. 금식을 했기 때문인 듯했다. 그런데 일이 터지고 말았다. 아들이 엄청나게 많은 설사를 해버렸다. 왜 그러지? 아들이 설사를 한 적은 없는데? 그렇지만 아들이 왜 설사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걸 치우는 게 급선무였다.


일단 잠시 모든 것을 멈췄다. 먼저, 일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부터 궁리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답이 없었다. 그럴 때는 차근차근 해치우는 수밖에 없다. 수액이 많이 들어가서 변이 묽어졌나? 염증 치료 중이어서 항생제 부작용인가? 계속 원인이 궁금하긴 했다.


이 일을 어쩌지?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반드시 해치워야 하는 일이다.


누가?

내가.


내 앞에 밀려온 쓰나미, 그건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도망갈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전쟁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동굴 속에 들어가 숨어버리면 되는 일 아닌가? 이건 전쟁 아닌 전쟁이었다. 한마디로 쓰나미가 몰려온 것이다.


대책은 심플했다. 깔개와 물티슈를 무한정으로 쓰면 처리될 수밖에 없다. 끙끙거리며 아들을 모로 눕혔다. 깔개를 자른 쪼가리를 온수에 적셔 아들의 사타구니를 닦으니 그저 그만이었다. 그것이 한 몫했다. 우여곡절 끝에 뒤처리를 다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옷, 깔개 커버, 패드에도 응가가 묻어 버렸다. 설사의 양이 많아서였다. 응가 묻은 옷이나 깔개 커버는 오물 처리실 수거함에 넣었다. 집에서부터 챙겨갔던 침대 매트 패드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다시 아들의 침대 커버와 시트를 깔아야 했다. 그게 혼자서 가능한 일일까? 물론 집에서는 가능했었다. 그러나 병원이라 여러모로 불편하고 아들의 몸에 너무 많은 것이 매달려 있어서 쉽지 않다. 잘못하다가 주사 바늘이 빠질 수도 있다. 그건 혼자 할 일이 아니었다. 도움을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담당 간호사가 남자였다.


"저 좀 도와주세요.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

"네네."

"제가 하라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네네."

"제가 아들을 이렇게 젖힐 테니 그때 이걸 아들 등에 넣어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저 혼자 다 할 수 있어요."

"네네."

침대 커버를 반쯤 말아 아들의 등짝 밑으로 넣은 후에 반대편에서 그 말았던 것을 펼치면 커버가 세팅된다.


힘으로 따지자면 남자 간호사가 아들을 돌려 눕히고 내가 침대커버를 밀어 넣는 게 맞는 거지만... 아무튼 네네,라고 하며 침대커버와 시트 까는 일을 도와준 남자 간호사는 그 순간에 짠하고 나타난 천사였다. 참 고마웠다. 감쪽같이 아들의 침대가 정리됐다. 아들은 여전히 잠에 취해 쿨쿨 자고 있었다.


그 틈을 타서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깔개와 물티슈를 몽땅 샀다. 또다시 설사 난리가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때로 예감이 잘 들어맞는다.

또 설사를 할 것 같은 그 예감~

그때만은 예감이 빗나가길 간절히 바랐건만...


[대문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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