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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Jul 20. 2021

옥상에서 놀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일 년에 몇 번 제 기능을 다하는 에어컨이 요즘 시간 외 노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거실에서 바라본 뜰, 우거진 초록은 더위 따위 무관하다는 듯 햇빛 아래 당당하게 서 있다. 마치 숲 속에 들어온 것처럼 눈이 시원해진다.


우리 집 뜰은 정말 작다. 그 작은 뜰에 나무를 심었다. 집 앞 언덕길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집안을 가리려면 울타리를 쳐야 했다. 울타리 대신 주목나무를 심었다. 주목나무 밑동이 허전해 보여서 심은 철쭉이 주목의 가슴팍까지 자랐다. 오가피나무도 심었다. 봄에 새순을 뜯어 나물을 만들어 먹으려고 심었지만 아직 몇 년은 더 자라야 할 것 같다.

새가 심은 나무도 있다. 새들이 떨어트린 씨앗이 지금은 건장한 벚나무가 되어 주목과  오가피나무와  동선을 이어 뜰의 중심에서 번듯하게 자랐다. 아마 그 자리에  벚나무가 없었다면 뭔가 허전했을 것이다. 줄기를 타고 올라가는 으름덩굴은 정글을 연상하게  한다. 봄에는 보랏빛 꽃과 향기를,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준다.


나무를 심고 기다리는 일은 무척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다. 이 나무들은 20년 전에 심었고 스무 해가  지난 요즘에야 내가 원했던 뜰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뜰은 여전히 좁다.



좁은 뜰에 목마른 나는 옥상 테라스를 뜰로 만들었다. 결혼할 때 친정어머니께서 된장과 고추장을 채워 보내주신 두 개의 항아리를 시작으로 하나, 둘, 모은 항아리들이 제법 장독대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아파트에 살 때에도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던 올망졸망한 항아리들이 간장 된장 고추장 대신 꽃들을 품고 있다.

땅의 면적을 온통 건물이 차지하고 있는 우리 집에서는  초록이를 키울 수 있는 공간이 많지가 않다. 대신 하루 종일 햇빛이 쏟아지는 옥상 위에서 꽃을 키우며 나는 또 다른 즐거움을 얻고 있다.



옥상 테라스에서 꽃을 가꾸다 보니 꽃 종류에 한계를 느꼈다. 처음 멋 모르고 커다란 화분들을 들여서 옥상 숲을 꾸미고 나서 그 해 초 겨울, 화분들을 집 안으로 들이느라 무척 힘이 들었다. 힘이 들뿐만 아니라 허리를 삐끗한 남편은 그 후로 도와주기를 꺼렸다. 그래서 겨울에도 밖에서 동면할 수 있는 꽃들을 심기로 했다. 그중 가장 애착이 가는 게 딸기다.  딸기는 꽃과 함께 예쁜 열매도 볼 수 있어서 좋다. 다만 줄기차게 줄기를 뻗지만  뿌리내릴 훍이 없는 시멘트 바닥이라는 게  아쉽고 미안할 뿐이다.

봄이면 보라색 꽃대를 내미는 아주가 꽃도, 별 모양의 씨앗을 온몸에 달고 있어서 한여름에도 크리스마스를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측백나무도 추운 겨울을 잘 견뎌낸다. 어디서 딸려왔는지 모르는 개구리밥 하나가 하늘을 담으려고 물을 받아놓은 질그릇 웅덩이를 파랗게 점령했다. 담쟁이는 벽을 타고 자꾸만 어딘가로 가고 있다.




단독주택에 사는 재미 중 하나는 텃밭을 가꾸는 일도 포함된다. 직접 심은 채소로 반찬을 만들어 먹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리 궁리를 해도 텃밭을 꾸밀 장소가 없었다. 터가 있으면 햇빛이 없고 햇빛이 좋으면 밋밋한 시멘트 바닥이었다.

옥상이 그랬다. 하루 종일 햇빛이 쏟아지고는 있지만 텃밭을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때마침 우리 동네 주민센터에서 '옥상에 텃밭 만들기'라는 프로젝터를 운영했다. 커다란 플라스틱 화분과 흙, 퇴비를 저렴한 가격에 공급받을 수 있었다.

옥상 한편에 텃밭을 만들고 나무 울타리를 쳤다. 한 평 남짓 텃밭이 생겼다. 흙이란 게 투자한 것보다 열 배, 많게는 그보다 더 많이 돌려준다. 겨우 상추 열 포기와 고추 다섯 그루를 심었을 뿐인데 여름내 남편과 둘이서 먹고도 남아서 가까이 사는 딸네도 주고 아파트에 사는 친구네도 보내주었다.

어느 해인가는 텃밭을 늘렸다. 나는 이제 서너 개의 플라스틱 텃밭을 가진 부농이 되었다. 텃밭 울타리에 '김 씨 농장'이라는 어엿한 팻말을 걸어 두었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은

''농장주님  넓은 농장 가꾸시느라 힘드시겠네요''라며 놀리지만 그래도 누구나 우리 집에 오면 제일 먼저 텃밭부터 둘러보곤 한다.


일주일 동안 남해안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맨 먼저 텃밭의 안부가 궁금해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옥상 위로 올라가 보았다.

와!! 텃밭 가득 꽃이 피어있다. 텃밭은 커다란 화분이 되어 보라색 치클리 꽃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매일 아침에 먹는 샐러드 재료였던 치클리잎이었지만 이제는 꽃을 즐길 차례인 것 같다.

꽃뿐만이 아니었다. 플라스틱 통에 담겨있어도 흙은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봄에 묻어 둔 아보카도 씨앗에서 싹이 트고 심지도 않은 피망이 여기저기에서 돋아났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너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우리 집에서 옥상이라는 공간은 더 이상 이불이나 말리고 빨래 건조대나 세워두는 곳이 아니다. 꽃들이 자라는 뜰이기도 하고 달팽이가 기어 다니는 텃밭이고 아침마다 우리 부부가 식사를 하는 외식장소이기도 하다.


어제는 이곳 옥상테라스에서 환상의 무대를 보았다. 소나기가 지나간 뒤 무지개가 떴다. 무지개는 도심의 빌딩 숲에 뿌리를 박고 건너편 산까지 휘어져 있었다. 하늘 아래 살면서도 허리 펴고 하늘을 바라보는 여유가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무지개는 자연이 보내 준 선물이었다.  나는 옥상 위에서 무지개가 사라질 때까지 하늘을 바라보았다.

                            쌍무지개 뜨는 옥상  (사진: 연희동 김작가)



인생은 기나긴 여행이다. 매일 새롭게 펼쳐지는 날은 어제와 닮은 듯 닮지 않은 풍경과 생각지도 않은 일들을 마주치게 한다.

어제 맺혀있던  메리골드 꽃봉오리가 오늘은 활짝 피어있고 아이가 기르다가 가져온 시든 완두콩이

밤 사이에 기력을 회복하였다. 

옥상은 식물뿐만 아니라 나의 삶도 건강하게 가꿔 준다.

오늘도 나는 이곳 옥상 테라스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며 즐거운 여행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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