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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 밀 Nov 01. 2022

084 가족 36 - 건망증

중년 남자의 잡생각


난 건망증이 심하다.


안 좋은 정도를 좀 설명하자면,



대학시절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나가

그 우산을 집으로 가지고 온 적이 없다.

4년 동안, 족히 100개 이상은 잃어버린 것 같다.




고 3 내내 짝꿍을 했던 친구를,

대학생이 되어 우연히

버스 정류장에서 만났다.


“야~ B밀! 반가워”


“어! 그래? 야~ 반갑다.

진짜 오랜 만이네.

야~ 진짜.. 야..”


“B밀! 너 내 이름 잊어버렸지?”


“응? 아… 어.. 음.. 너 이름이 뭐였지?”


고 3 내내,

나를 봤던 친구이기에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섭섭해한다.




과거 가장 친한 친구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너처럼 입이 무거운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무슨 소리냐 했더니,

본인이 사내연애를 한 지 몇 년이 지났고,

그 이야기를 나 말고는 한 사람이 없는데

소문이 안 나는 것을 보고,

내가 진짜 신뢰할만하다고 생각했다 한다.


근데 사실,

그 친구가 사내연애를 하는 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는 매번 처음 듣는 이야기 같았다.


기억을 못 하기에 누군가에게 옮기지 못할 뿐이었지,

알았더라면 금방 이야기를 했을 것 같다.



 

연애 시절,

영화관을 갔다가,

실수로 남자 화장실로 들어가려는

와이프를 향해


“어.. 어.. 야! 저기! 어이! 거기 남자 화장실이야!”


라고 했다가,

이름을 안 부르고, 야, 저기가 뭐냐며

한 소리 들었는데,

순간 이름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




때론 와이프가

오빠 좋은 대학 나온 거 다 거짓말 아니냐고

묻곤 한다.


뭐 하나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없고,

본인이 이야기하면

(에어컨 끄고 방에 들어와라, 언제 문 닫아라,

뭐 좀 버려달라, 기타 등등)

다 “OK”를 외치고는

하나도 실행하는 것이 없으니

금붕어 아니냐고 이야기를 하며

나의 학력 위조를 심각하게 의심한다.




육아 휴직 기간,

가족이 부모님 댁을 방문하여

함께 식사를 할 때이다.


아버지가 와이프에게 묻는다.


“그래서.. 큰 딸아이가 어디 학원에 들어갔다고?”


“아.. 네..

이번에 A 학원이랑 B 학원이랑 갔어요.”


“아하..”


수저를 몇 번 뜨시고는


“그래서.. 큰 딸아이가 어디 학원에 들어갔다고?”


? (나와 와이프, 어머니 셋이 눈을 마주친다.)

아.. 이번에 A 학원이랑 B 학원 갔다고요.”


“아하..”



식사를 마치고,

아버지가 과일을 깎아 먹자고 하신다.


“그래서.. 큰 딸아이가 어디 학원에 들어갔다고?”


“아! 몇 번을 물어봐! 그만 좀 해!”


어머니가 소리를 지르신다.

이후, 아버지는 2번을 더 물어보셨다.


와이프도 신혼 초부터

아버지를 겪어봐서 알고는 있지만

5번 같은 질문은… 새로운 기록 경신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가 오빠한테 기억력 나쁘다고,

맨날 뭐라고 하지만,

아버님 뵈니깐, 아직 오빠는 멀었다.

진짜 우주 최고신 듯!”


 

큰 딸아이도 어느 순간부터

엄마건 아빠건 누가 말을 해도

알겠다..라고 대답은 잘하는데,

나중에 왜 안 했냐고 물어보면

“언제 말했어?”라고 되묻는다.


아버지, 나, 큰 딸아이로 이어지는

집안 내력인가 보다.




P.S. 근데 신기한 건, 나도 그렇지만, 아버지와 큰 딸도

‘본인이 기억하고 싶은 것’들은 아무리 오래되어도

생생하게 기억을 한다는 것이다.

단지 기억 못 하는 사람으로 다른 사람의 뇌리에 박혀,

진실을 말 해도 믿어 주지 않을 뿐.

(그러니 와이프에게 뭐라 뭐라 말을 하면,

언제 그랬냐며? 더 우기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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