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단의 큰 별과 시를 통한 조우
시를 쓴다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
자정적自淨的 과정이기도 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송두리째 빼앗겼던 저 옛날 일제시대,
학교라는 조직 속에서 몰래 시를 쓴다는 것이 유일한 내 자유의 공간이었고
6.25 고난의 세월 속에서는 나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했다.
대추와 꿀벌
대추를 줍다가
머리
대추에 쳐박고 죽은
꿀벌 한 마리 보았다
단맛에 끌려
파고들다
질식을 했을까
삶과 죽음의
여실如實한 한 자리
손바닥에 올려놓은
대추 한 알
꿀벌 반 대추 반
눈이 시리도록 푸른 가을 하늘
조국
허리 짤리운
우리 산천에
미국 군대가 있고
어찌 또 다시
우리 산천에
일본이 오는가
무덥던 여름
장농 깊은 곳에서
숙고사 연분홍 치마
은조사 흰 적삼
소중히 꺼내어 입고
시골 신작로 따라
국민학교 운동장 가던 새색시
모두 어우러져서
한 덩어리가 되어
울음 섞고 눈물 뿌리며
만세를 불렀다
이제는
오손도손 우리끼리 살겠구나
내 땅에 와서 내 겨레 가슴에
숱한 못질을 하던
그들이 가는구나
부모형제를 찾고
우리말 찾고
내 이름도 찾고
아아 내 옷도 찾아서
이제 찬란한 햇빛 아래
내 산천을 바라보리
새색시 백발이 되었고
세상만사 다 변하였는데
그 때 눈물과
그 때 기쁨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시래기죽에
물 한 그릇 더 부어서
배고픈 나그네
시장끼 달래주던 시절
헌옷 깁고
실 물어끊으며
땀좀 닦고 묵으소
어머니가 말했었지
기막힌 그 시절은
가난이던가
진정 기막힌 그 시절은
不幸이던가
가을
방이 아무도 없는 사거리 같다
뭣이 어떻게 빠져나간 걸까
솜털같이 노니는 문살의 햇빛
조약돌 타고 흐르는 물소리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 그러고 있다
세월 밖으로 내가 쫓겨난 걸까
창밖의 저만큼 보인다
칡넝쿨이 붕대같이 감아 올라간 나무 한 그루
같이 살자는 건지 숨통을 막자는 건지
사방에서 승승 바람이 스며든다
낙엽을 말아 올리는 스산한 거리
담뱃불 끄고 일어선 사내가 떠나간다
막바지의 몸부림인가
이별의 포한인가
생명은 생명을 먹어야 하는
원죄로 인한 결실이여
아아 가을은 풍요로우면서도
참혹한 계절이다 이별의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