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관으로 살아간다는 것(24)
(사진 출처-픽사베이)
며칠 전, 내가 근무하는 부산소방본부에서 또 자살사건이 일어났다. 소방서에 들어온지 6개월도 안 된 신입대원이 자신의 집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한다. 한달 전쯤에 일어난 낙동강 특수구조대 직원에 이어 내가 아는 한, 올해 들어서만 벌써 두번째다. 물론 전국적으로 본다면 더 많은 소방관들의 자살이 일어났을 것이다.(얼마전 국제 소방관의 날에 경기도 과천소방서 새내기 소방관이 자살을 하기도 했다.)
https://news.v.daum.net/v/20220623203833906?f=m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7044200&code=61121111&cp=du
물론 한달 전에 일어난 소방관 자살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그 자살 동기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일부 언론에서는 상관의 갑질이 원인이었다는 쪽으로 보도했지만 정확한 내용은 상급부서와 관련기관의 감사와 조사가 마무리되고 나서 밝혀질 것이다. 개인적인 문제였는지, 아니면 직장과 관련된 문제였는지는 아마도 자살한 본인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그것이 개인적인 문제였더라도 소방관이라는 직업에서 비롯된 어려움도 그 개인적인 문제에 일정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같은 직장 동료로서 소방관이라는 직업의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몇몇 동료 소방관 분들의 명복을 빈다.
왜 이렇게 많은 소방관들이 자살을 하고 그 수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지 않고 더욱 늘어나는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그 원인을 찾아보게 되는데 가장 많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 화재, 구조, 구급 현장에서 끔찍한 사건을 목격하고 그것이 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남아 일상생활에 영향을 끼치고 결국에는 자살을 선택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상사의 갑질이나 동료간의 불화이다. 내가 처음 소방서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소방서의 근무체계는 24시간 2교대 근무였다. 24시간 당번근무를 하고 집으로 퇴근해서 24시간 비번으로 가정생활을 하고 다시 24시간 당번근무를 서는, 그야말로 다람쥐 쳇바퀴처럼 도는 2교대 근무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거기다 당번근무시에는 화재출동, 구조출동, 구급출동을 나가야 했다. 힘든 출동을 하고 돌아와서 쉴 시간이라도 있으면 좋은데 웬만해선 그 쉬는 시간도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센터로 복귀해서는 공문을 생산하고, 보고서를 만들고, 일지를 작성하고, 차량과 각종 장비들을 점검, 보수하고 청사 내외 청소까지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같이 근무하고 있는 상관이나 동료와 사이가 좋지 않아 24시간 내내 부딪힌다면?
정말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을 것이다. 물론 그럴 거면 소방서 생활을 그만 두고 다른 직장으로 옮기거나 퇴사를 하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24시간동안 잠도 제대로 못자고, 거기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우울증까지 앓고 있다면 정상적인 판단을 하기도 어려워진다. 그야말로 진짜로 '극단적'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물론 요즘은 근무체계가 바뀌어 24시간 당번 근무를 한 후, 48시간의 비번이 주어진다.(이런 근무체계도 아직 완전히 확정된 것이 아니고 부산소방본부에서는 시범적으로 운영을 하고 있다.) 일단 비번시간이 늘어났으니 갑질하는 상사나 불화하는 동료와 함께 있을 수밖에 없는 시간이 조금 줄어들어서 나아지긴 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바뀌지 않으니 이런 자살 사고들이 줄어들지 않는 게 아닐까?
내가 처음 소방서에 들어왔을 때도 24시간 2교대 근무체계가 내 몸이 맞지는 않았다.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저녁 6시에 들어오는, 근 10년동안 지켜온 평범한 일상의 사이클이 완전히 깨지고 아침 9시에 출근해서 하룻밤을 온전히 소방서에서 직원들과 함께 보내고 다음날 아침 9시에 퇴근하는 새로운 사이클에 금방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어찌 보면 가족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낼 수밖에 없는 고참 직원들 사이에서 막내 직원인 내가 눈치를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될 수 있으면 그들 눈에 벗어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고 특히나 화재 현장에 가면 더욱 긴장이 되었다. 내가 무엇인가를 실수해서 화재, 구조, 구급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것 같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이 그런 초임시절을 기억하는 선배나 고참들은 항상 있었고 대부분 그런 나를 도와주고 가르쳐 주려는 사람이 주위에 있었다. -그런 사람들 덕분에 나는 소방서의 막내 시절을 그래도 용케 버텨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때도 자신의 나이와 계급을 이용해서 갑질을 하려는 일부 고참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사건과 마찬가지로 그 고참은 내가 소방서에 들어와 처음으로 모신(?) 우리팀의 팀장이었다. 그 때 우리 팀에서 나이와 계급이 가장 높았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그 사건의 시발점은 화재현장이나 구급현장이 아닌, 팀 회식 자리에서였다.
20여년 전, 24시간 2교대 근무만큼이나 소방서에 처음인 내가 좀처럼 적응할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소방관들의 회식문화(?)였다. 회식 당일날이 되면 24시간 당번근무를 하고 아침에 퇴근한 소방관들은 곧바로 인근의 산을 찾아 등산을 시작했는데 그 목적지는 산 정상이 아니라 산 중턱쯤에 있는 오리집(?)이었다. 멋진 족구장이 딸린 그 오리집에서 반주를 겸해 점심을 먹고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족구를 한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면 산을 내려와 시내에서 또 저녁겸해서 밤새 술을 먹다가 다음날 새벽에 바로 소방서로 출근하는 것이 당시 소방관들의 일상적인 회식 문화였던 것이다.-이것은 20년 전 소방관들의 회식 모습이다, 요즘은 이런 모습은 사라지고 119(저녁 6시에 시작해 1자리에서 1가지 술로 저녁 9시까지)회식이 정착되었다.- 거기다 막내로 들어온 신입 직원이 회식비를 부담하는 것이 관례라고 해서 아직 제대로 월급도 받지 못했던 내가 당시엔 거금이었던 50만원을 회식비로 내야만 했던 것이다. 결코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런 감정을 대놓고 드러낼 수도 없었다. 다들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술고래들인데다, 체력들도 좋은지, 24시간 당번 근무에 24시간 회식에, 다시 24시간 당번 근무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인데도 누구 하나 불평하는 이가 없었다. 왜 아무도 불평하지 않는지는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 모든 배후에는 팀장이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만난 팀장은 다른 것은 다 용서해도 회식중에 누군가가 빠지는 것은 용서하지 못하는 팀장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저녁 10시쯤에 집에 가겠다고 말했다. 술도 경상도 말로 '이빠이' 취한 상태였다. 너무 피곤해서 집에 가서 좀 자고 와야겠다고 팀장에게 말했다. 이제 막 들어온 막내가 너무 피곤한가 보구나 하면서 그냥 보내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팀장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진짜로 갈려구?"
술이 이빠이 취한 상태였지만 이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구나 하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난 너무 피곤했다. 24시간 근무에다 다시 24시간 회식이라니,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란 생각이 머릿속을 짓눌러 왔다. 그 순간에는 팀장이 날 좋아하든, 싫어하든 내 알 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빠이 취한 술 때문이었으리라. 인사를 꾸벅하고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팀장과 팀원들을 외면하고 돌아섰다. 뒷통수가 좀 따갑긴 했지만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때 벌써 팀장에게 '찍혀'버렸다는 사실은 미처 알아채지 못헀다.
다음 날 집에서 자고 나고 소방서로 출근했을 때, 팀장의 태도는 싸늘해져 있었다. 다른 팀원들과의 거리도 서먹해져 있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팀장은 나에게 어제 먼저 간 것 때문에 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별 것 아닌 일로 잔소리 하는 날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그 당시 소방차는 제일 위에 소방호스를 싣게 되어 있었는데 요즘같은 장마철에 비가 오면 위에 실린 호스가 젖을까 봐, 비닐 천막같은 것으로 비오는 날에는 소방차 위에 실린 호스를 덮었었다. 그걸 '갑빠 친다'고 했는데 비가 오려고 하면 막내인 내가 미리 갑빠를 쳐 놔야 했다. 그런데 하늘에 구름이 좀 끼어만 있어도 팀장은 왜 갑빠를 안쳤냐며 나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다음엔 날씨가 좀 흐리다 싶으면 갑빠를 쳐 놓았는데 그러면 비도 안오는데 왜 갑빠를 쳤냐며 또 잔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정말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 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가 팀장이 사무실로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갑빠를 쳐야 할 지, 걷어야 할 지 노이노제에 걸릴 지경이었다.-현장에서 끔찍한 것을 보는 것도 PTSD지만 이렇게 사람에게 걸리는 PTSD는 오히려 소방관의 정신건강을 더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 같다.-
하나의 예만 들었지만 이렇게 별 것 아닌 일로도 사람을 스트레스 받게 하니 다른 것들은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그 팀장은 6개월 후에 인사이동으로 다른 곳으로 가고 다른 팀장이 오면서 나의 트라우마는 겨우 치유될 수 있었다. -그 팀장과 6개월만 더 있었어도 나도 아마 소방서를 그만두었거나 어쩌면 극단적(?)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소방서 팀장이라는 사람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소방서 자체의 페쇄성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소방서는 출동이 없을 때면 차고의 셔터를 내려놓는데 그러면 외부 사람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20년 전 소방서는 폐쇄적이었다. 그래서 많아야 열명 안쪽인 팀원들을 자기가 장악할 수 있으면 그 안에서는 자신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그릇된 믿음을 가진 팀장들이 종종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새로 들어온 신참내기 직원은 더없이 쉬운 먹잇감이었을 것이리라. 그래서 만약 그 직원이 마음에 안들면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괴롭히고 나중에는 스스로 옷을 벗고 나가게 만드는 악질적인 팀장들도 있다는 것을 소방서 짬밥이 차면서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부류는 극소수고 대부분의 팀장이나 고참 선배들은 나의 소방생활에 무엇이든 가르쳐 주고 도움을 주려고 하였다. 그리고 20여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악질적인 팀장이나 고참들은 모두 물갈이(?)가 되고 지금은 그런 사람을 찾아볼 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사건을 언론에서 보도한 바에 따르면 20여년전의 악습을 아직도 되풀이하고 있다는 말이니 정말로 기가 찰 노릇이다.
내가 그 팀장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로부터 5년 후쯤, 어느 LPG충전소에서였다. 그 때 내 차가 가스차였기 때문에 가스 충전을 하러 들어간 그 충전소에서 난 어딘지 귀에 익은 악다구니(?)를 들을수 있었다.
"야이, 이 *새끼야!, 이걸 이렇게 주면 어쩌란 말야!"
어쩐지 귀에 익은 그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을 때, 난 허연 백발의 그 팀장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는 택시 운전석에 앉아 택시 기사 복장을 하고 충전소 직원에게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다.-그 때 당시만 하더라도 소방관으로 정년 퇴직하고 나면 택시면허를 주는 제도가 있었다.-
'저 인간, 아직도 저렇게 살고 있구나~'
난 충전이 끝나자 창문을 내리지 않고 조용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결코 아는 체를 하거나 인사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퇴직때까지 그토록 소원하던 진급을 해 보지 못하고 퇴직헀다는 말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스쳐간 악연은 한번으로 족한 것, 그가 내 인생의 한부분이라도 더 이상 발을 들이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내 솔직한 감정이었다.
이번 신임 소방관 자살 사건이 나의 신입 시절 팀장과 같은 케이스였는지, 아니면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었는지는 아직은 속단하기 이르다. 앞에서도 말했던 것과 같이 상급부서와 관련기관의 조사와 감사가 명백하게 이루어진 후라야 모든 것이 확실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 신입직원이 적어도 나의 신입시절과 같은 어려움을 겪고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란다. 만약 그렇다면 근 20년 동안의 소방 조직의 뼈를 깎는 자정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착했던 누군가의 아들, 순진했던 우리의 후배를 지켜주지 못한 못난 선배로 영원히 남게 될까 두렵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