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재 중 NC 28731 14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e in Oct 14. 2024

헨더슨빌의 가을색

불타오르네

 미국에서 가을이 시작되면, 펌킨 스파이스 라떼가 빠질 수 없다. “펌킨 스파이스 라떼를 마셔야 비로소 가을이 시작된다”는 말처럼, 그 분위기에 휩쓸려 한 잔을 주문해 보았다. 달콤하고 알싸한 향, 그리고 시나몬이 가득한 라떼 한 잔에 가을이 온전히 담겨 있었다. 비싸서 자주 마시지는 못하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이곳의 가을이 나에게 조금 더 특별해진 기분이다.  


 얼마 전, 동부 여행을 다녀왔더니, 뉴욕 같은 화려한 대도시와는 다르게 헨더슨빌의 소박함이 더 또렷이 느껴진다. 산으로 둘러싸인 작고 평화로운 마을 헨더슨빌의 아기자기한 거리들. 이곳은 대도시의 빽빽한 빌딩들 속에서 맛볼 수 없는 여유가 가득하다. 이곳에선 시간이 더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고 자연이 더 가까이서 손짓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행을 다녀온 지 고작 일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아이 학교 교정의 나무들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노란 스쿨버스 뒤로 펼쳐진 붉은 나무들, 초록 잔디 위에 흩어진 낙엽들. 아침 등교 길에서 마주친 풍경이 마치 한 장의 그림엽서 같다.

 계절이 참 빠르게 바뀐다. 엊그제 봄이 왔던 것 같은데, 어느새 여름이 지나가고 이제는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어 아이들은 다시 학교에 돌아가고, 곧 찬바람이 불면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질 텐데, 그때 나는 어떤 마음을 품고 있을까?


 집에 돌아와 아침 산책을 나서려던 참에, 우리 집 화단에 핀 들장미가 눈에 들어왔다. 사실 미안하게도 나는 이 장미를 거의 돌보지 않았다. 물도 제대로 주지 않았고, 관심을 두지 않아서 눈길도 자주 주지 않았던 꽃이었는데, 일 년 내내 그 장미는 당당히 제자리에 피어 있었다. 처음에는 연약해 보이기도 해서 금방 시들어버리겠거니 했는데, 여름에 잠시 시들어 죽어가는 듯했으나 가을에 다시 찬란하게 꽃을 피운 것이다. 계절과 상관없이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는 핑크빛 장미가 기특하다.


 이 장미, 어딘가 우리 가족과 닮았다. 우리는 헨더슨빌의 이 커뮤니티에서 유일한 한국인 가정이다. 처음에는 이곳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도 많았고,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들장미처럼 우리도 이곳에서 조금씩 뿌리를 내리며 우리의 자리에서 피어나는 중이다.


  조금 늦게 아침 산책을 나왔더니 햇빛이 온 세상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가을바람은 차가워졌지만, 햇살은 여전히 따뜻하고 강렬하다. 모든 것이 빠르게 지나가는 이 가을 풍경 속에서 헨더슨빌에 막 왔을 때의 나 자신과 지금의 나는 마음 가짐이 많이 달라져있는 것이 느껴진다.


 헨더슨빌에 처음 왔을 때는 마치 내가 외계인이 된 것 같았다. 내 나라에서의 바쁨이 아니어서 느긋하게 여유를 부릴 수가 없으니 굵직한 것들을 처리해 내느라 더 수고로웠다. 언어부터 문화 음식 여러 부분에서 짧은 시간 안에 잘 어우러지는 것은 어디서든 시간이 필요한 나에게는 많이 버거웠다. 그래서 속하지 못하고 둥둥 떠다니는 경험으로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이 지역을 하나라도 더 알기 위해 열심히 살았던 나를  칭찬하며 마음의 여유를 찾는 가을을 만끽하고 싶다.


 루비 트리라고 나 홀로 이름을 붙인 나무가 가을의 온화한 햇살을 받아서인지 반짝반짝 빨갛고 예쁘기도 하다. 온화한 가을의 아침 햇살 샤워받고 또 큰 힘을 얻고 간다. “오늘도 내 일상을 잘 지켜보자! ”

 사랑하는 사람들아 허무함도, 쓸쓸함도 모두 우리네 인생이니 힘을 내어 버텨봅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헨더슨빌의 가을색은 불타는 듯한 빨강이다.  그 강렬한 색감은 계절의 끝을 알리는 듯하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고, 그래서 풍요롭지만, 동시에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다. 자연이 가장 화려하게 빛나는 이 순간, 사실은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을은 기쁨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참 묘한 계절이다.

  헨더슨빌과 작별해야 할 때 즈음 아마도 복잡한 심정일 듯하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짧아서였는지 그만큼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아마도 이곳에서 경험한 모든 것들이 나에게 소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든 장소와 사람들과의 이별이란, 마치 오래된 친구와의 작별처럼 가슴 아프겠지만, 이곳에서 잘 살다가 가는 것이니 이별 앞에서 너무 슬퍼하지 않도록, 천천히 마음을 준비해보려 한다. 가을의 찬바람 속에서도 여전히 따뜻한 햇살을 남기듯, 나도 헨더슨빌과의 마지막 순간을 소중하게 간직하며, 그 아쉬움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싶다. 아! 가을을 타나 보다. 찬바람과 함께 느껴지는 아쉬움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아름다움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