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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우리들의 파라다이스

[33화]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by 마이 엘리뷰


"생각보다 아이가 할 수 있는 말이 많아서 놀랐어요."

미국에서 집근처 기관 입학을 앞두고 아이의 현재 역량을 평가하기 위한 평가 자리가 있었다. 몇 차례에 걸쳐 언어와 감각통합, 전반적인 적응 기술에 대한 평가가 이어졌는데, 의미있는 영어 한 문장 그럴듯하게 구사해본 적 없는 외국인인데다 특수교육 (Special Education) 대상자이다 보니 학교에 첫 발을 내디디는 마음이 경쾌하지만은 않았다. 남들은 '내가 벌써 학부모라니!'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거릴 타이밍에 '하아, 괜찮을까' 한숨부터 나오는 게 당연했다. 외국인인데 장애인이기까지 하니 겹겹이 장벽인 셈이었으니까. 무겁게 아이를 평가 세션에 넣고 낯선 이국의 학교로비에 앉아있는데 한 시간쯤 지나 금발머리 선생님이 아이 손을 잡고 환하게 웃으며 나온다.


생각보다
아이가 할 수 있는 말이
많아서 놀았어요


"아, 얘가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에서 어린이집을 다닌 세월이 더 많다보니 딱히 영어 표현이라고는 '하이, 헬로우' 정도밖에 없을 터인데, 도대체 얘가 무슨 말을 해서 이렇게 호들갑일까 궁금했다. 기관에서 아무리 영어 특별활동을 한다고 꼬박꼬박 3-4만 원 정도를 낸들, 자폐스펙트럼 아이 특유의 '제한된 관심사'라는 것은 그 어떤 수업에 들여보내도 금방 등지게 만드는 경우가 다수라 애초에 큰 기대를 품은 적이 없었다. 알고보니, 복도를 지나다 엘리베이터가 보여서 '엘리베이터!'라고 했고, 교실 안에 노란 버스 자동차가 있어서 '버스!'라고 했던 거다. 그 외 차 이름은 브랜드별로 섭렵하고 있으니 BMW며 TESLA며 읊어댄 모양. 허허허.


아이가 알파벳과 파닉스를 떼서 알아맞힌 게 아니라, 좋아하는 차를 볼 때마다 무릎반사마냥 외쳐댔을 뿐인데 선생님 눈에는 '한국에서 온 장애아이가 영어를 아네?' 적잖이 감탄사가 나왔나보다. 아니, 한국에서도 비엠더블유는 비엠더블유고, 테슬라는 테슬라인 건데, 이게 뭐 대단한 일인가. 한국에서도 늘상 쓰는 외래어나 고유명사마저 '영어 잘하는' 경지로 받아들인 선생님들의 넓은 마음에 내가 더 감탄한 순간이었다. 아, 그쵸그쵸. 그 정도쯤은 할 수 있죠. 별 것도 아닌데 잠시 어깨가 으쓱해졌다.


IMG_3008.jpeg 아이의 작은 성취마저도 힘있게 칭찬해주는 동네. 엄마인 내가 생경할 정도로 우쭈쭈 해주는 데 인색하지 않은 학교


말도 안 통할텐데 타국에서의 발달 평가가 의미있을까. 아니, 진행이나 될 수 있을까. 아이가 다닐 학교에 몇 차례 방문할 때마다 늘 무거운 마음으로 입장했는데, 돌아서서 나올 땐 항상 반전의 기분이었다. 별것이든, 별것이 아니든, 그들은 항상 단단히 결심이라도 한 듯 칭찬 일색이었고, 물개박수를 터뜨렸으며, 평가를 마친 아이 손을 꼭 붙들고 나와 환한 에너지로 배웅해줬다. 한국에서도 늘 치료실 수업이 종료되면 선생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오지만, 이토록 따뜻하고 밝은 기운이 담긴 적은 드물었다. "어머님, 오늘 잘했고요. 근데..."라는 말끝의 흐림에서부터 나는 또다른 걱정을 품고 고민과 고뇌를 이고지고 집에 돌아온 적이 대다수였기 때문.


내겐 너무 익숙한 한국이건만 아이는 늘 겉도는 한국이었다. 아이가 잘하는 것도 많았겠으나, 문제를 낳는 경우가 더 많았다. 치료실에 잘 들어갔다가도 선생님과 방안에 들어가는 루틴이 꼬이면 수업 안하겠다고 40분 동안 짜증투성이 모드였으며, 원에서 잘 지내는 듯하다가도 돌연 한 여자친구의 머리를 잡아당기거나 등을 밀었다는 이야기가 종종 들려왔다. 잘하는 게 있어도 '이랬어요, 저랬어요' 이슈의 중심에 섰다는 피드백 받는 게 늘 익숙한 엄마였으니, 찾아갈 때마다 자동 고개가 숙여졌다. 어느 그룹에서나 신경다양성 아이는 갈등을 일으키는 장본인으로 지목받기 일쑤였다. 삐뚤어진 부분 없이 단정한 아이들 틈에서 다양성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건 이토록 피곤하고 죄송한 일이구나! 고개가 빳빳한 엄마들 틈에서 눈을 내리 뜨는 몸짓에 길들여지던 참이었다. 눈쌀을 찌푸리며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도 습관이었다. "아 진짜요? 죄송합니다. 집에서도 조심하고 주의시키겠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것을 눈여겨 보고 격려해주세요.
그러면 나도 잘 할 수 있는 게 아주 많답니다.

엘런 노트봄, <자폐 어린이가 꼭 알려주고 싶은 열 가지>, p. 34


이 글은 단순히 '미국은 옳고, 한국은 그르다'는 끝맺음을 위해 달려온 건 아니었다. 신경다양성 아이를 두고 미국은 따뜻했으며 한국은 각박하고 매정했다는 류의 비교체험 에세이를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아무리 미국의 문화와 환경이 그 어떤 형태의 장애에 열려있다고 한들, 나는 한국의 제도권에서 너무나 무난하게 자라난 '한국이 더없이 편한' 엄마 사람일뿐더러, 타국은 그 어떤 혜택이 주어진다해도 어렵고 두렵다.


다만 이것만은 분명했던 것 같다. 아이가 가진 '매력 포인트'를 힘껏 발굴해준다는 것. 선생님이든, 이웃이든, 신경다양성 아이도 '잘한다'고 너그러이 우쭈쭈 해주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아이의 발달이 느린 것 맞지만 느리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고, 때때로 독특하다 못해 이상해보일 때도 있지만 "얘 왜 이러냐고?" 되묻고 캐묻지 않았다. 자폐성 장애 아이라고 해서 뜨문뜨문 위아래로 훑는 '불신'의 시선도 없었고, 발달장애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고 해서 불편한 '호기심'의 시선을 덧대지도 않았다. 그냥 한 아이의 엄마로 바라봐주는 날것 그대로의 시선이 그토록 고마운 건 줄 미국에서 깨달았다. 이상한 나라에서 온 느린 걸음의 아이가 여유있게 걸을 줄 안다고 웃어주는 동네였다.


아이가 가진 매력포인트를
힘껏 발굴해준다는 것

이상한 나라에서 온 느린 걸음의 아이가
여유있게 걸을 줄 안다고
웃어주는 동네였다


신경다양성 아이에게 완벽한 파라다이스란 없다. 미국 역시 장애 아이를 키우는 데 결코 무지개 빛깔 세상만은 아닐 것이다. 키즈 프렌들리하고 오티즘 프렌들리 하다고 해서 감탄하고 있다가 (5화. Autism Welcoming을 아시나요?) 동네 단골카페에서 인종차별을 느낀 적도 있다. (11화. 영미문학의 본 고장에서 펑펑 운 사연) 아무리 선생님이 친절하다고 한들 토종 한국인으로 자란 내가 그들과의 부모상담 세션에서 수다쟁이가 될 수 없는 건 늘 아쉽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엄마는 늘 조그매지는 법이니까. 한국과 미국을 굳이 따지지 않아도 신경다양성 아이의 비장애 동생을 키우는 일은 완벽하게 결이 달라서 양국 어디에서나 고민을 더하는 숙제가 남는다. (7화. 신경다양성 아이 동생도 키웁니다) 이곳에 머무나 저곳으로 달려가나 힘든 자국이 지워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아이와 앞으로 함께 걸어나갈 공간이 긍정의 발자국으로 물들어가길 바라는 마음은 같다.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잠깐 스치는 이웃이 나와 아이를 향해 평범하게 웃어줬으면 좋겠는 마음. '오티즘 프렌들리'를 상징하는 인증 스티커가 없어도 누구 하나만 프렌들리하게 반겨줬으면 좋겠다고 꿈꾸는 마음. "그런 애가 여길 오겠어?"라며 장애인 주차구역을 막아두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애타게 희망하는 마음. (이건 정말 절실합니다.) 완벽한 파라다이스는 없겠지만, 옅은 파라다이스를 꿈꾸는 마음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다. 선명한 색채에 또렷한 그림 선은 아닐 지라도, 마치 흐릿흐릿해서 금방 지워질 것 같은 파스텔 톤 그림일지라도, 신경다양성 아이 가족이 고군분투하는 여정이 어딘가에 잔잔히 드리우고 있음을.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IMG_3805.jpeg 비장애 동생도 함께 걷고 있는 아름답고 푸른 신경 다양성 세계
IMG_3407.jpeg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도 결국엔 함께 손 잡고 깔깔댈 수 있는 마음. 우리가 함께 걷는 공간이 긍정의 발자국으로 물들어가길 기대하는 마음.
https___kids-i.kakaocdn.net_dn_bijKiO_btsP3eHJe32_aCAVSXqSAHIcof5bsFkwIk_img.jpeg 신경다양성 아이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너나 할 것 없이 파랗게 물들어가는 공간.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 브런치북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는 1편과 2편, 총 33화로 구성돼 있습니다. 미국행 이전, 신경다양성 이야기의 시작이 궁금하시다면 1편으로 놀러와주세요.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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