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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풍기 날개, 나무싱크대와 비둘기

Brooklyn - Clandestine

by 베리티

에어컨이 있어도 선풍기를 좋아한다.


천정에 실링팬이 돌아가는 공간이 좋다. 에어컨의 냉감에 비교할만한 것은 아니지만, 훅 쏟아지지 않고 빙빙 돌고 돌아서 바람을 구석까지 밀어준다. 여름의 그 카페는 에어컨과 함께 벽걸이 구식 선풍기를 틀어놓는다. 얇고 파란 플라스틱 날개가 회전하면서 이리저리 돌아간다. 아무리 더워도 냉동고 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얼얼함보다는 서서히 바람처럼 다가와주는 차가움을 바라고 있나 보다.


노트북을 펼쳐서 투덕투덕 두드리는데, 옆테이블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한낮에 맥주를 마시고 있는 두 남녀. 살살 부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얼핏 꾸미지 않은 듯 보이지만 신경 쓴 옷차림이다. 언젠가 친구와 나눈 대화가 떠올라서 픽 웃음이 난다.

"너 항상 자다 깬 거 같은 옷차림인데, 그게 참 편해 보여."

옆에 있던 남자애에게 말했더니 그는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이거, 엄청 신경 쓴 거야."


아무튼 그 테이블에는 길게 늘어뜨린 머리에 청록색 원피스와 스케치된 프린트가 있는 티셔츠와 청바지가 마주 앉아있다. 이 시간에 나올 수 있다면 적어도 직장인은 아니다. 얼핏 30대 초반즈음 되어 보이는데, 들려오는 대화에 따르면 여자는 애엄마고 남자는 아마도 옛 동료인 듯하다.

여름 한낮의 맥주. 별로 이상할 건 없다. 맥주 거품이 잔에 가득 떠오른다.

여자의 남편은 그림을 그린다. 자신을 편하게 해 주는데, 그게 여자가 바라는 부분이 아닌가 보다. 자기 세계를 지키고 싶은 것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아무래도 자기는 남의 영향을 크게 받는 편이라 이대로 지내다가는 뭔가 잃어버릴 것 같다고 했다. 정확히 그녀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들어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남편이 주는 편안함이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이혼까지 생각하고 있다.

남자는 그녀를 말린다. 그렇게 쉽게 볼 일이 아니야. 그런 대화들이 오가고 있다. 들어보면 꽤 심각한데,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듯해버린다. 그냥 그렇게 말로 내뱉으면서 커 보였던 문제들이 하찮아지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사실 별 거 아닌 일들이었어. 심각할 필요가 없다. 여러 말들이 오갔지만 결국은 대화라는 퍼포먼스로 하나의 결말을 향해 간다. 그렇게 선명해지기를 계속 시도하는 것. 맥주잔이 다 비워질 즈음이면 다 털고 일어나는 결말이 준비되어 있는 것처럼. 대화 사이에 앉은 먼지들은 선풍기 바람에 날아갈 것이다.


오늘 아침 온도계가 -1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엊그제 같던 여름이 먼 옛날 사진첩의 한 페이지처럼 저장되었다. 옷을 두껍게 입으라는 뉴스가 계속 흘러나온다. 긴 패딩쟈켓을 꺼내고 가벼운 목도리도 둘렀다. 막상 나와보니 바람이 불지 않아서 그다지 춥지 않다. 동네를 지나다가 누군가 집 앞에 내놓은 나무 책상을 보았다. 책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목재로 책상처럼 이어 붙인 테이블에 작은 수도관이 하나 달려있었다. 그럼 싱크대였나. 왜 버려진 걸까. 만들다가 만 실패작인가.

제 자리에 있지 않은 것들이 주는 이질감이 있다. 책상 같은 싱크대는 어디로 갔어야 했을까.

공원을 지나다 보니 노오란 잎들 아래 벤치에 사람들이 앉아서 쉬고 있다. 길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통통한 비둘기 한 마리가 꼼짝도 앉고 있다. 가만히 보니 다리가 하나뿐이다. 눈동자가 꽤 씩씩해 보인다. 그 옆을 조용히 지나친다. 문득 초현실주의 화풍의 그림 속에 들어온 기분이 든다. 궤도를 살짝 이탈한 것들 사이의 질서를 엿본 것도 같다. 흔들림과 삐걱거림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다. 그들만이 아는 규칙도 있다. 되돌아갈 자리가 분명히 있다. 우리가 모르는 세계의 비밀이 있다.



Brooklyn - Clandestine

https://www.youtube.com/watch?v=V_ZJ6rBmf8s

넷플릭스 미드 'Shameless'를 보다가 알게 된 곡. 오래전 미드인데 우리 정서와는 거리감이 있는 부분도 있지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은 이야기다. 게다가, 좋은 음악들이 마구 쏟아진다.

불완전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아. 남들 보기에 어떤지 몰라도 심지어 나름의 즐거움이 있을 때도 있지.

바다 건너 음악을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한 템포 늦게 본토 템포를 접하게 되는 건가 싶을 때가 있다. 타란티노 나 자무시 감독이 영화 음악을 쓰는 것을 볼 때 다가오는 그 심정. 이름도 잘 못 들어봤지만 음악 기막히게 만드는 밴드들을 볼 때가 특히 그렇다.

코드 안에서 변주를 주는 보컬 파트, 그리고 멜로디처럼 두두두둥 몰아치는 베이스 라인에 감탄이 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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