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패가 생긴 날
"이번 역은 여의도, 여의도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깊은 지하도를 빠져나오자 고층 빌딩들이 먼저 시야를 채운다.
꽃샘추위라 바람이 차갑지만, 나는 힘차게 걷는다.
햇살 좋은 오늘—내 첫 출근이니까.
3월.
학창 시절 새 학기가 시작되듯, 나의 직장생활도 지금부터 시작이다.
초등 6년, 중등 3년, 고등 3년, 대학 4년, 대학원 2년까지—
재수도 휴학도 없이 이어진 18년을 지나 드디어 사회인.
오늘을 위해 그 긴 시간 동안 쉼 없이 갈고 닦았던가.
빌딩 숲 사이 유난히 빛나 보이는 건물— 여기가 나의 회사다.
당당하게 정문을 지나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입사한 마케팅부 신입사원입니다.”
“네, 확인하고 게이트 열어드릴게요.”
삑 - 게이트가 활짝 열렸다.
발걸음은 한없이 가볍고, 마음은 긴장보다 행복으로 가득했다.
‘한 명 뽑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대기실에는 다른 여직원이 더 와 있었다.
밝은 갈색의 긴 머리, 큰 눈, 키카 큰—전체적으로 서구적인 외모에 화려한 인상.
짧은 단발에 수수한 정장을 입은 나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알고 보니 그녀는 나의 동기.
오늘 함께 발령이 났다.
“여러분, 아주 오랜만에 우리 부서에 신입이 왔네요.
1실은 박유나 씨, 2실은 김연수 씨입니다. 모두 환영해 주세요.
참고로 두 분 모두 미혼이십니다. 박수!”
"(작게) 안녕하세요. 저는 박유나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또렷이) 안녕하십니까. 저는 신입직원 김연수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 연수 씨 목소리가 상당히 크시네요. 하하.”
소개가 끝나고 각자의 자리로 갔다.
파티션이 둘러진 내 자리, 깨끗한 책상, 무엇보다 눈에 들어온 건
[김연수 사원] — 진작부터 여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는 명패.
내 이름의 사원증도 자랑스럽게 목에 건다.
잘 보정되어 실물보다 더 예뻐 보이는 증명사진이 박혀 있다.
비싼 곳에서 증명사진을 찍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조직도와 자리배치도에도 내 이름과 내선번호가 있다.
‘옆자리 남자분은 김 과장님, 뒷자리 강대리님, 그 옆은 정 과장님, 그리고 가장 안쪽은 면접 때 뵀던 송 부장님… 같은 실 소속. 얼른 외워야지.’
사무실엔 수많은 소리가 층층이 흐른다.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 통화하는 소리, 키보드, 발걸음 … 모두 각자의 소리를 만들어 내며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이곳.
‘앞으로는 내 소리도 여기에 더해지겠지?’
점심시간이라고 하기엔 좀 이른 것 같은데 누군가 우리 둘을 불렀다.
“두 분 같이 나가시죠. 점심시간에 공식 일정이 있습니다.”
직장인에게 소중한 ‘점심시간’은 첫날부터 백반으로 급히 끝났다.
식사 후 상무님과 부장님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이동—회사 강당.
“안녕하세요. 다들 오셨나요?” 베토벤을 닮은 남자가 들어왔다.
“오늘 새로 오신 두 분, 앞으로 나오실래요?”
“악보 보이시죠? 어렵지 않아요. 가볍게 한 번 불러보시죠.”
“네? 네...”
피아노 반주가 시작되고, 우리는 순서대로 노래를 했다.
“두 분 모두 소프라노로 하겠습니다.”
여기는 사내 합창단.
매주 월요일 12시~1시 전체 연습.
오늘은 월요일.
노래를 썩 좋아하진 않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입사 첫날. 우리는 합창단원이 되었다.
윗분들을 챙겨 매주 월요일 합창단에 가는 일은 막내들의 롤이 되었다.
우리 부서뿐 아니라 합창단에 유독 임원들이 많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대표님이 직접 사내 합창단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표님이 연습에 오시는 날이면, 공기는 어쩐지 무거워지고 모두가 더 집중했다.
그럴수록 합은 더 잘 맞고, 노래는 한층 매끈해졌다.
공연이 다가오면 추가연습과 리허설로 야근도 생긴다.
흰 블라우스와 검은 롱스커트를 입고, 제법 큰 무대에 선다.
연말에 임원 가족들이 와서 꽃다발을 건네면, 잠깐 본업이 잊히기도 한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고층빌딩 사이로 차가웠던 여의도 공기.
그럼에도 따뜻했던 햇살.
예상치 못한 입사동기.
그리고 합창단 입단.
첫 출근의 강렬한 기억들—설레는 시작.
하지만 명패가 붙었다고 바로 소속감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내 이름 앞에 붙는 또 하나의 꼬리표 – 스펙
어쩌면 그 스펙이 지금의 ‘캔디’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곳에서 내 첫 소리는 합창이었다.
사무실에서도 잘 어울리는 화음을 맞출 수 있을까.
완벽한 화음을 위해, 나는 조용히 내 소리를 보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