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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별건가 그냥 걸어
by myosil Jul 15. 2018

순례자의 하루

까미노데산티아고(2) 이상과 일상 사이

까미노에서의 하루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7시~8시 사이, 힘겹게 침낭속 몸을 일으킨다.
간단한 세수를 하고 짐을 싼 후 따로 준비한 아침거리를 먹는다.
기상 30분만에 알베르게를 나선다.
걷는다.
Bar가 보이면 들어가서 카페콘레체를 마신다
걷는다.
Bar가 보이면 들어가서 초콜라떼를 마신다. 샌드위치 같은 것이 있다면 점심을 떼운다.
걷는다.
Bar가 보이면 들어가서 카페를 마신다.(맥주일수도 있다.)
걷는다.
2~4시 사이 쯤 묵기로 한 마을에 도착한다.
알베르게에서 순례자 카드에 도장을 찍고 침대를 배정받는다. 씻고 빨래한다.
간단히 동네구경을 하고 슈퍼마켓을 들른다.
알베르게에서 저녁을 해먹거나 동네 식당에서 순례자 메뉴를 사먹는다.
일기를 쓴다.
잠에 든다. 8~9시 쯤이다.


이런 하루가 거의 바뀌지 않고 40일 계속되었다. 묵는 마을과 집은 매일 바뀌는데, 서울에서보다 더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이 묘하게 느껴졌다.


순례길을 떠나기전, 상상 혹은 기대했던 것 같다.

‘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신은 있는 걸까?’

‘무엇이 행복한 인생일까?’

걸음걸음 이같은 질문들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다가 어느날 문득 깨달음이란 걸 얻을 거야.

뭔가가 다른 내가 되어있을거야.


하지만 실제로 내가 한 생각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오늘 숙소에 나를 위한 침대가 있을까?’

‘오늘도 비가 올까?’

‘점심 뭘 먹을까?’

‘알베르게 샤워실이 좀 좋아야 할텐데...’

‘부엌이 있을까?’

‘동네에 마트가 있다면 뭘 해먹지?’
 
항상 1순위는 먹는 것이었다.
Bar란 순례길 마을마다 있는 커피와 같은 음료와 간단한 스낵류를 파는 작은 가게다. Bar는 그야말로 우리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였다. 심하게 얘기하면, 순례길은 Bar에서 Bar로 옮겨 다니는 여정이었다. 오전 중에 Bar에 들러 카페라떼인 ‘카페콘레체’를 먹어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오후엔 스페인 오믈렛 또르띠야를 먹어야 힘이 났다. 가끔 와인이나 맥주 한잔을 하기도 했다.

모자로 천장을 꾸몄던 특이한 Bar! / 한 bar에서 먹은 타파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점심이나 간식이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가장 큰 일은 저녁식사다.(하루 중 가장 큰 일일수도 있다!) 우선 직접 해먹을 수 있는지 확인한다. 돈도 아낄 수 있는데다, 동행인 언니의 요리솜씨가 좋아 직접 해먹는 것이 최선이었다. 직접 해먹으려면 조건을 충족해야 했는데, 요리도구가 잘 갖춰진 부엌이 있는 알베르게와 식재료가 풍성한 슈퍼마켓이 마을에 있어야 했다. 시골 중의 시골인 까미노에서 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느 하루는, 거의 일주일간 지나온 알베르게들이 음식 해먹기가 시원찮았는데, 그 날의 알베르게는 요리하고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이 넓고 조리도구도 잘 갖춰져 있었으며, 마을에 슈퍼마켓도 컸다. 이른 저녁부터 슬금슬금 순례자들이 부엌으로 하나둘 모이더니 세계 요리 대회가 펼쳐졌다. 이런 곳을 기다린 것이 우리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한국팀의 삼겹살, 프랑스팀의 연어스테이크, 이탈리아팀의 크림리조또... 각국 대표 요리의 맛도 보고, 와인과 소주를 건배하면서 파티같은 저녁식사를 했다.
 

세계요리올림픽 중 / 한국대표선수 요리, 삼겹살에 *이슬


이렇게 해먹을 여건이 되지 않으면 주변 레스토랑에 순례자 디너가 괜찮은지 찾아본다. 보통 메뉴판을 외부에서 볼 수 있어 조사가 가능하다. 순례자 디너 메뉴는 10유로 정도인데, 보통 샐러드, 본식, 후식, 와인까지 가성비가 뛰어났다. 어린양고기 요리부터 하몽이나 쵸리소(스페인식 소시지) 요리 등 내가 찾아서는 먹어보지 못할 요리들을 많이 대접받았다. 20km씩 걷고 먹는 저녁인지라, 뭘 먹어도 맛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늘 그렇게 저녁식사에 힘을 쏟았고, 매일매일 맛있고 감사하게 먹었었다.
 

음식 그림으로 가득찬 일기장


밥 준비 다음으로는 빨래다. 옷가지가 몇장 되지 않아 바로바로 빨아야 한다. 하지만 초반에는 추워서 땀을 많이 흘리지 않아 그냥 말려서 입기도 했다. 지금 생각에 매일매일 옷을 빨아야 했다면 꽤 힘들었을 것 같다. 비오고 추운 날씨로 고생만 한 건 아니었던 셈이다.
밥과 빨래를 해결한 후에는 일기를 쓰거나 순례자들과 수다를 떨었다. 그러고는 8~9시에는 잠에 들었다. 10시를 넘긴 적은 거의 없었다.
 
순례길에서 나는 대부분 본능적이거나, 현실적인 생각을 하며 걸었던 것 같다. 기대와 달라서 실망할 만도 한데, 아니었다. 오히려 어느 순간에는 단순한 생각만 하며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현실 생활에서는 물론이요, 까미노 전 장기여행에서조차 두통과 함께 복잡한 생각들이 늘 따라다녔다. 내일 보고서 어떡하지? 다음 도시로는 어떻게 이동하지? 늘 내일, 일주일 뒤, 몇달 뒤, 몇년 뒤를 걱정했고, 오늘의 일에는 무감각했다. 하지만 까미노에서 가장 중요한 건 오늘, 이 순간이었다.
걸으면서 다른 생각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여행이 끝나고 난 후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에 집중하고 있으니, 오히려 여러 생각들이 더 자유롭게 펼쳐졌다. 더이상 그것들이 ‘걱정’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장기여행 1년을 하고 순례길을 걸었는데, 그제서야 진짜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Camino de Santiago) 이지만, 그 어떤 순례자도 오직 산티아고에 도착하기 위해서 길을 걷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산티아고는 단지 이 길에 끝에 있는 곳일 뿐이다. 모든 것은 길 위에서 일어난다는 걸, 순례자들은 몸으로 깨닫게 된다더니, 나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여행이 뭘까 꽤나 진지하게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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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말고 다 합니다. 보통 직장녀의 여행, 취미, 덕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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