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까미노데산티아고(3) 사랑과 욕망의 길!?
*주의: 까미노길에 대해 애정을 갖고 계시거나 천주교이신 분들께는 다소 불경하게 느끼실 수 있다는 점,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7년전 1년 3개월간 여행을 했었다. 그 중에 까미노길을 걸었다. 그 긴 여행동안 많은 것을 해봤지만, 못한 한가지가 있다면, 로맨스의 경험이다.
힘든 여행 중에 꾸미고 다닐만큼 나는 여유로운 성격이 아니었다.(...) 당시 내 몰골을 사진으로 보면 여행에'만' 집중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맨 아래 참조) 그 긴 여행 중 썸 한번 없었냐고 하는 질문에 답할 것이 없어 늘 민망해하곤 한다.
대신, 여행 중 로맨스를 꿈꾼다면 까미노데산티아고에 가라고 추천하곤 한다. 우리 일행이 까미노데산티아고를 부르던 다른 이름, 바로 “사랑과 욕망의 길”!! (미리 알았다면 참 좋았을 텐데...!)
사랑과 욕망의 길이라고?
생각해보라. 30~40일간, 전세계에서 온 건강한 청년들이 매일매일 길을 떠난다. 대부분은 혼자다. 길은 하나이고 방향도 정해져 있으므로 나란히 걷게 될 수 밖에 없다. 오후 2~3시면 알베르게에 모이게 되니, 저녁을 함께 먹는 것은 각자 하기 나름이다. 여기까지 왔다면 생각도 깊고 고민도 많은 사람들이니 속 깊은 얘기를 터놓기도 쉬울 것이다. 그렇게 선남선녀가 매일 마주치고 친해지다 보면 정이 들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있을까?
아, 그런데 순례길에서 로맨스를 기대한다면 체력을 키워서 가야 할 것이다. 혹은 체력이 흘러 넘쳐 너무 빠르게 달려도 안된다. 일단 대상과 속도는 맞아야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꼭 청년들의 얘기만도 아니다. 까미노를 걷는 순례자는 남녀노소 아주 다양한데, 한 호주 아저씨는 이혼을 하고 상처를 치유하러 순례길을 걸으러 왔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며칠 뒤에 보니 한 여성분과 손을 잡고 길을 걸으시더라. 아! 나는 그때서야 이곳이 사랑이 꽃피는 길임을 알아챈 것 같다.
우연히 들른 Bar에서 한 호스피탈레로(까미노의 자원봉사자, 까미노를 마친 사람만이 할 수 있다)를 만났는데, 한국 순례자인 우리를 유독 반가워했다. 그는 예전 까미노를 걸었을 때 한 한국 여성 순례자에게 반했고, 이후 한국까지 찾아갔었다고 한다. 결국엔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좋은 추억이라고 했다. 덕분에 우린 한국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컵라면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까미노 1편에서 잠깐 언급한)첫날 만난 까불거리던 멕시코 아이도 중간 도시에서 다시 만났을 때 둘이 되어 나타났었다. 그는 그 사이에 무리를 했는지 상태가 안좋았는데, 알베르게에서 밤에 악몽을 꾸며 소릴 질러댄 그를 여친이 따뜻하게 다독여 주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야말로 까미노의 시련을 사랑으로 극복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까미노, 아침드라마의 배경이 되다
그런데 우리 일행이 여길 ‘사랑과 욕망의 길’로 이름 붙였던 이유는 아름다운 사랑만 있던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왠지 로맨스를 목적으로 까미노에 온듯한 한국여자분이 있었는데, 덕분에 순례길 위에서 아침드라마가 펼쳐졌다. 동양사람에게는 인사도 안하던 그 분은 서양 남자들에겐 유독 친절했는데, 한 잘생긴 독일 아이와 일행이 되어 같이 다니게 되었다. 식당에서 그 남자애 앞에서 갑자기 노래를 부른다던가, 자신이 몇살같냐고 묻더니 16살이라고 한다던가(누가 봐도 거짓말이었다...). 순례길에서 볼 수 있으리라곤 상상하지 않았던 작정한 끼부림(...) 덕분에 그녀는 우리 사이에 알게 모르게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녀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심심한 순례길에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우리에게 적잖은 활기를 제공해주었다.
그런데 며칠 뒤 길이 갈라졌다가 합쳐지는 곳이 있었는데 거기서 그녀가 그 독일애를 찾고있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잘생긴 독일아이가 그녀를 피했던 것. 아아, 이 드라마는 비극이 되려는 걸까? 그 친구는 여러 서양 남자애들과 길을 걷더니 결국 종착지 산티아고에 두사람이 되어 도착했다고 전해들었다. 집요한 노력으로 목적을 이룬 그녀야말로 최종 승리자였고, 우리들은 그저 실속없는 호사가들이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에피소드. 거의 산티아고 도착 직전 만난 한국 남녀 일행이 있었다. 순례길에서 만난 둘은 꽤 초기부터 같이 다녔다고 했다. 뭔가 묘한 분위기가 있었는데, 알고보니 남자애가 여자애를 일방적으로 따라다닌 것이고, 그 때문에 여자애는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례길을 혼자 걷고 싶다고 계속 남자애에게 부탁했지만 그는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여자애는 한국에서의 힘들었던 일을 털어내고 싶어 순례길을 왔는데, 여기서 만난 인연조차 떨쳐내지 못하고 있어 눈물까지 보였다고 했다. 까미노의 사랑은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니어라…
그 자체로 낭만적인 길
사랑과 욕망의 길이라니, 우리끼리 웃자고 하는 말이었긴 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과 영혼 없는 질문을 하게 되는 노잼 소개팅보다는, 민낯의 모습을 보여주며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순례길에서의 만남이 나에겐 더 낭만적이다. 로맨스가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생김새부터 다들 제각각인 순례자들과 이 길을 걷는다는 이유 하나로 금새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이 길의 매력 중 하나인 것은 틀림이 없다.
행여 누군가 (다소 불경한) 다른 목적으로 이 길을 시작했다고 해도, 결국엔 이 소박한 까미노길을 순수하게 사랑하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모든 것에 효과나 효율을 따지는 요즘 시대에, 40일간 800km를 걷기로 한 것 자체가 낭만이고 로망이 아닐까? 그만큼 순수함이 가슴속에 있는 사람들이기에 까미노에 올 수 있었을 것이다.
여튼, ‘’까미노에서의 사랑’은 나에겐 이루지 못한 로망이다. 언젠가 다시 한번 이 길을 걷게 된다면, 옷도 좀 예쁜 걸로 준비하고 화장도 좀 하고 다녀야지 다짐한다....
음, 아마도 둘째날쯤 금새 포기해버릴 것 같지만.
2012 까미노데산티아고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