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까미노데산티아고(5) 순례길이 남긴 것들
순례자들 중 가장 천천히 걸었다고 자부하는 우리. 그런 우리에게도 마지막날은 찾아왔다. 순례길의 종착지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스페인 갈리시아(Galicia) 지방의 도시로서, 예루살렘, 로마와 더불어 중세 3대 순례지 중 하나이며, ‘성 야곱(Santiago)’과 ‘별의 들판(campus stellae)’의 합성어이다. 7세기경 스페인의 수호성인(守護聖人)인 성 야곱의 무덤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곳에 성당을 지었고, 이 산티아고대성당이 까미노데산티아고의 종착지이다.
이거 실화냐?
산티아고로부터 100km 남은 지점의 표지판을 만나 (쩔은 표정으로) 기념 사진을 찍은 날부터였던가.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만 했다. 왜? 믿겨지지가 않아서. 사실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정말 내가 800km를 다 걸었단 말야?
순례길 위는 산티아고 도착 며칠 전부터 뭔가 들떠있는데, 도착 전날 최고조에 이른다. 산티아고로부터 불과 5km 떨어진 곳 Monte de Gozo에 내가 본 가장 큰 규모의 알베르게 단지(?)가 있는데, 대부분의 순례자는 여기서 하루밤을 보낸 뒤 아침 일찍 산티아고로 가서 종일 피날레를 즐기는 것이 관례인 모양이었다. 이 거대 숙박 단지엔 걸어서 온 사람은 물론이고 자전거로 온 사람들, 단체 학생들까지 북적대고 있었고, 서로 남다른 눈길을 주고받으며 D-1를 보내고 있다. 나의 두근대는 가슴처럼 이 알베르게 전체가 둥둥 풍선처럼 날아갈것 같다. 일기장을 보면 도착 당일보다 전날 더 생각이 많았다. 하루 종일 39일간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아른거리며 감상적이었다가, 벌써 끝났다니 아쉬워하다가, 이걸 다 걸었다니 스스로 기특하다가- 이런 감정 기복을 반복한 나머지, 다음날은 오히려 덤덤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심지어 도착한 날은 일기도 쓰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한두시간만에 도착한 산티아고는 중세풍의 꽤 큰 도시였다. 순례자들 뿐 아니라 다양한 관광객들로 도시는 복작거렸다. 지금까지 순례길의 소박한 아름다움에 비하면 그다지 매력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산티아고를 향해 40일을 걸어온 나에겐 도시가 멋이 있던 없던 중요치 않았다. 이 곳이 바로 그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이고 내가 이 곳에 있다는 사실만이 의미가 있을 뿐.
아마, 시간이 잠깐 멈췄던 것 같아.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들어찬 여느 관광도시같은 복잡한 골목, 구석구석 자리한 노란 화살표를 따라갔다. 빨리 가고 싶은데 천천히 가고도 싶었다. 설렘과 아쉬움이 동시에 나를 흔들어대는 가운데, 길을 꺾어 들어갔다.
순간, 거짓말처럼 넓은 광장이 펼쳐졌다. 멀리 구름 사이로 새어나온 눈부신 빛이 산티아고대성당의 거대한 실루엣을 비추고있었다.
헐.
외마디 탄성과 함께, 이 뭉클한 느낌은 뭐지. 눈물이 왈칵 쏟아질만큼은 아니었지만- 순간 시간이 잠시 멈춘 것 같았다. 내가 이 길을 걷기로 결심하기도 전에, 아니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이 성당은 나를 여기서 기다려온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종교가 있는 사람들은 이 순간에 좀 더 구체적인 무엇을 느꼈을 터였다. 하지만 난 그것을 정확히 설명할 능력이 당시에도, 지금도 없다.
광장에는 나같이 이 성당을 목적지로 제발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온 순례자들이 각자의 의식을 치르고 있다. 광장 바닥에 앉거나 누워 생각에 잠겨있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성당앞에서 사진을 찍거나, 서로를 진심으로 축하하며 끌어안기도 한다. 나 역시 멍하니 앉았다가 사진을 찍고 환호성을 질렀던 것 같다. 하나 더, 이 순간이 두번 오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눈 앞의 성당의 모습을 일기장에 그렸다. 나만의 순례 완성 기념식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광장에 있다가, 순례자사무실로 가서 순례를 마쳤다는 증서를 받았고, 성당 안으로 들어가 유명한 미사를 구경했다. 그 다음에 산티아고에서 종일 한 것들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밥을 먹고 기념품을 사는 등 그저 관광객처럼 즐겼던 것 같다.
보통 산티아고에서 스페인의 땅끝마을, 피니스테라까지 며칠 더 걷는 순례자들도 있다. 그 땅끝 바닷가에 도착해서 가져온 물건을 태워야 진정한 순례가 완성된다나? 우린 걸을만큼 걸었다며, 피니스테라까지는 버스로 하루만에 다녀왔다. 그렇게 41일만에, 나의 까미노데산티아고 대장정은 그 감격적인 막을 내렸다.
내가 거길 갔다 온 게 맞나?
순례자로서의 40일은 내 인생에서 손에 꼽을만한 경험이었지만 놀랍도록 빨리 잊혀졌다. 산티아고 도착 하루만에, 아니 반나절만에 나는 순례자에서 관광객으로 돌변했고, 서울로 돌아온 뒤엔 또 생활자로서 금방 적응해서 살아가고 있다. 까미노의 일들은 대부분은 잊어먹은 채로 일상을 보내고, 가끔 동행했던 언니와 만나면 수다로 추억팔이를 하는 것이 다다. 6년이 지나서야 글을 써보기로 결심하고서 찬찬히 그 날들을 짚어보고 있다. 물론 허구헌날 그걸 들여다보고 살수는 없겠지만, 내가 무엇때문에 그렇게까지 걸었던 건지, 싶기도 하다.
그런데 기억해보면, 어떤 순간 -크고작은 위기들이 닥치거나, 다 버리고 떠나고 싶을 때- 문득 까미노가 떠오르곤 했다. 그런 순간에 눈을 감고 잠시 까미노 위에 내가 있다고 상상을 해보면, 신기하게도 지금의 일이 별게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여기서 더 참지 못하겠으면 확 까미노로 다시 떠나버리자!라고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그랬더니 또 신기하게 잠시 평정심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나 조차도 나를 버리고 싶을 때, 갈만 한 곳 하나를 지구 위에 남겨두었다고 생각하니 까미노에서 참 많이 얻어왔구나, 싶다. 까미노를 걸을 때, 두번째라는 순례자들이 꽤 있었는데, 이제서야 이해가 된다. 두번째 까미노 걷기. 내 버킷리스트는 줄지는 않고 늘어만 간다.
한가지 더 얻은 것이라면 걷기의 재미를 알아버린 거다. 평생 걸을 걸음은 다 걸었다고, 한동안 지긋지긋한 걷기 여행은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금새 그 단순함이 그리워졌다. 순례길이 끝난 산티아고대성당 광장으로부터 미얀마의 껄로트레킹, 운남성 차마고도, 스리랑카의 아담스픽, 그리고 네팔 안나푸르나까지, 또 다른 순례길들로 내 여행의 역사는 이어지고 있다.
아, 늘 고생하는 무릎에겐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2012 까미노데산티아고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