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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OSIL Jul 29. 2018

[까미노데산티아고] 아날로그 여행엔, 아날로그로

2012 까미노데산티아고(4) 기억과 기록

까미노를 걸었던 때가 어언 6년 전이다. 희미한 기억을 끄집어 내어 글을 쓰려니 힘겹긴 하다. 당시 기억은 일기장 한권과 몇장 없는 사진, 도장으로 빼곡한 크리덴시알(순례자의 여권), 순례자 수료증, 길잡이가 되었던 미쉐린 가이드북 정도다. 까미노 도착 전 멕시코를 여행하던 중에 휴대폰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수중의 디지털기기라곤 낡은 카메라 하나였고 기록은 손으로 쓰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 제대로 아날로그적인 여행이었던 것이다.

장장 40일 동안 겪었을 많은 일 중 남아있는 것이 내 흐릿한 기억과 한줌의 물건이 전부라니, 좀 억울하긴 하다. 그런데, 삐뚤한 글씨로 빼곡한 일기장을 해석(?)하며 당시를 다시 복기해보는 것도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일기장을 읽고 떠오르는 몇가지 기억들을 나열해본다.


17번째날. 까미노 위 냉엄한 경쟁을 겪었다.

유난히 걸음이 느린 우리 일행은 그날 도착하는 마을에 침대가 충분한지 항상 체크해야 했다. 대부분은 안심하고 느릿느릿 걸었는데, 유독 이날 도착할 곳의 알베르게에는 침대가 단 30여개 있는데다, 그 다음 마을이 6km나 떨어져 있음을 가이드북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 며칠 전부터 긴장을 했고, 당일 무려 7시에 숙소를 나섰다. 바람이 몰아치는 날씨에도 걸음을 늦출수 없었다. “저 35명 선착순에 꼭 들어가야 해!!” 핫 둘! 핫 둘! 1초에 두 걸음을 내딛는 1초 걸음법으로 4km/h의 최고 속도 기록! 결국 목적지에 7, 8번째 순례자로 도착했다. 감사하고 뿌듯하면서도, 마치 한국에서의 경쟁사회 속에 있는 듯한 느낌에 씁쓸한 날로 기록되어있다.

까미노는 경쟁사회...ㅠ


22일째날. 제일 많이 웃었던 날이다.

지역 커뮤니티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에 묵었는데, 유쾌한 분들이 저녁을 준비해주셔서 까미노 전체 통틀어 가장 많이 웃었던 날이었다. 자원봉사자로 이루어진 저녁준비팀의 리더, 앙헬(스페인어로 엔젤!)이라는 아저씨는 큰 목소리로 식사 자리를 진두지휘하시더니, 급기야 그를 시작으로 국가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한국 대표로는 한 대학생아이가 ‘여행을 떠나요’를 불렀다) 다같이 플라멩코에 마카레나를 부르며 춤을 추고 나서야 저녁자리가 마무리되었다. 여긴 분명 스페인이고 다들 외국말을 하고 있는데 우리 외가댁 시골의 동네 잔치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앙헬아저씨의 몹쓸춤, 아저씨가 구박했던 한 이탈리안 깐족이


25일째날. 백숙 덕에 살아남았다.

순례길 내내 비가 왔지만 이날은 우박에, 바람까지 역대급이었다. 가혹한 날씨에 지친 몸으로 도착한 알베르게엔 마침 순례길에서 자주 만났던 일행들이 먼저 와있었다. 한국인 대학생, 이태리 오빠, 일본 언니로 구성된 팀인데, 우리와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 이태리 오빠는 요리에 자부심이 있으셨던 분인데, 재료가 완벽히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최대 2인분까지만 요리가 가능하다는 것이 약점이었다. 동네 슈퍼에 구비된 재료가 변변찮아 그가 당황하는 사이, 마침 닭고기와 마늘이 있어 우리 일행인 언니가 백숙을 뚝딱 만들어냈다. ‘어떻게 닭과 마늘만으로 이런 요리를 만들지?’하는 눈으로 언니와 백숙을 번갈아 쳐다보던 이태리 오빠의 표정이 기억난다. 그 날 숙소가 정말 추웠는데 따뜻한 백숙을 먹지 않았더라면 정말 얼어 죽을 뻔했다.  


31째날. 적과의 동침.

아침, 말로만 듣던 베드버그(bedbug, 빈대...ㅠ)를 침낭에서 발견하고 말았다! 내 머리맡에서 뽈뽈 기어가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그야말로 멘붕! 풍경과 날씨가 드물게 좋았던 날이었는데,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27 km를 걸으려 했던 계획은 포기하고 18km 지점의 한 숙소에 자릴 잡았고, 소독삼아 침낭을 햇빛에 말리고 대대적인 빨래를 했다. 침울한 나머지 슈퍼에서 해물탕 재료를 사다가 끓여먹으며 밥을 세그릇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베드버그의 충격을 밥으로 극복했다.


32번째날. 오늘이 바로!

그렇게 비가 오던 순례길이 언제 그랬냐 싶게 청명한 날씨가 이어졌다. 오르막이라 힘든 하루를 예상했는데, 풍경이 너무 좋아서 힘든 것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뒤늦은 봄이 한순간 터져나오듯 산 곳곳 알록달록한 꽃들이 피어있고, 아기자기하면서 독특한 갈리시아 지역의 전통 마을까지- 문득, 오늘이 까미노길의 하이라이트임을 직감했다. 오르막 꼭대기 오세브레이로라는 마을에 짐을 풀었다. 꿀뿌려먹는 이 지역 전통치즈와 고추가루와 올리브오일을 뿌린 문어요리 뿔뽀까지. 모든 것이 좋았던 환상적인 날이었다.

순례길의 하이라이트 풍경을 끄적였다.
35일째날. 묵언수행에 도전하다.

순례길 초반, 한 순례자가 말을 하지 않고 길을 걷고 있는 걸 본적이 있다. 그 인상적이었던 묵언수행을 오늘 일행들과 해보기로 했다. 말을 하지 않고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걸어보고, 먼저 말하는 사람이 커피사기 내기를 했다. (참 별것 다 하면서 걸었구나.) 나름 말없이 열심히 생각을 하려고 했지만 억지로 생각을 위한 생각을 하려니 좀이 쑤셨다. 한두시간 후 불쑥 말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커피는 내가 사게 되었다. 다들 힘들었었다며, 우리에게는 안맞는다는 결론이었다.  

묵언수행 중.


38일째날. 오랫만의 자동차와 아늑한 휴식

까미노길에 더위가 극성이다. 땀 뻘뻘 흘리며 겨우 알베르게에 도착했는데 침대가 없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 망연자실하고 있는 우리 일행에게 알베르게 매니저가 제안하기를, 근처 호텔에 자리가 있어 차로 데려갔다가 묵고 내일 아침 이 곳으로 데려다 주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당연히 콜!!! 그렇게 차에 올라탔는데, 생각해보니 38일만에 타는 차였다. 고작 5분이었는데 빠른 속도감이 무척 이상하게 느껴졌었다. 30년 차를 곧잘 타다가 고작 몇십일 타지 않았다고 이렇게 낯설다니, 사람은 적응의 동물임을 다시금 느낀 순간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호텔은 숲이 포근하게 감싼 아늑한 곳이었다. 수건도 주고 침낭이 필요없는(알베르게에선 있을 수 없는 일!!!) 깔끔한 침대가 이토록 감동이라니. 양고기에 와인을 곁들인 호텔 저녁식사도 만족스러웠다. 이 날의 휴식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좋긴 좋았나 보다.


기록마저 지독한 아날로그 여행

당시 스마트폰이 없어서 저녁 자유시간에 할일이라곤 일기장을 끄적거리는 것뿐이었다. 그날의 컨디션 상태에 따라 얼기설기 썼을 일기를 보며(못 알아보는 글씨도 많다!) 이게 나인가? 싶을 정도로 새삼스럽다.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이 들다가도, 읽어 내려갈수록 기억이 스멀스멀 떠오르는 것도 신기하다. SNS로 남긴 여행의 기록과는 확실히 다른 감성이다. 지금 와서 보니 오직 걸어서 가는 여행과 꽤 어울리는 기록법이었구나 싶다.


만약 지금 내가 같은 곳을 여행하기 위해 떠난다면, 스마트폰을 빼고 갈수 있을까? 스마트폰을 가지고 까미노를 걷는다면 그때처럼 일기를 부지런히 쓸수 있을까? 일기쓰기는 고사하고, 까미노에서조차 스마트폰을 보면서 걷게 되는것 아닐까?  

문득, 그때 그렇게 어설프게 떠났던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2 까미노데산티아고 이야기

01 순례자가 된다는 것 

02 순례자의 하루 

03 어떤 불경한 로망 

04 아날로그 여행엔, 아날로그로 

05 잊고살다가 문득 


*2018 뚜르드몽블랑 일주 여행기 1편

*2017 히말라야트레킹 여행기 1편

*휴가로 갈만한 걷기여행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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