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까미노데산티아고(1) 순진한 순례자의 첫걸음
유럽여행을 가고 싶지만 돈이 없었던 대학 시절, 친구가 알려준 까미노데산티아고 순례길. 하루 숙박 5유로면 한달 간 유럽여행을 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해서 솔깃했었다. 그런 방법을 알았지만 유럽 여행은 가지 못하고 시간이 흘렀다. 30대가 되어 여행 못간 한(?)을 풀려고 떠난 장기 여행 중에, 막연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이 순례길이 문득 생각났다. 당시 장기여행의 후반에 접어들어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던 탓에, 다소 충동적으로 원래 일정까지 취소하고 스페인으로 떠나게 되었다.
단돈, 2유로에 순례자가 되다
800km를 직접 걷는다는 게 어떤 건지는 짐작도 할 수 없었고, 신도 믿지 않으면서, 체력도 저질인 내가, 까미노를 걸을 자격이 있는 걸까 자문했다. 하지만 그 모든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걸으면 무엇인가 정답 같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막연하고 무모한 마음가짐으로 까미노데산티아고 프란세스 순례길의 시작점 마을, 생장피에드포트에 도착했다.
1,000년이 넘은 순례길이라더니, 중세시대 언제쯤에 멈춰진 듯한 성곽 마을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트레킹 물품, 관광기념품 등을 파는 가게들이 있어 꽤 리얼한 테마파크에 온 느낌이 들었다. 마치 시간여행하듯 빨려 들어간 생장 성 올드타운의 좁은 골목 39번지에 자리잡고 있는 순례자 사무실. 직원에게 2유로를 내면 내어주는 순례자의 여권인 ‘크레덴시알’을 받고, 순례자의 상징인 조개껍데기 하나를 골라내는 간단한 절차를 거쳐, 일개 관광객이었던 나는 순례자(Pelegrino) 신분이 되었다.
마치 동사무소에서 서류 하나 떼는 정도의 과정을 거쳤을 뿐인데, 순례자로서의 혜택은 꽤 크다. 나는 이제 순례자 숙소인 알베르게(Albergue)에 가서 고작 5~10유로에 베드 하나를 얻어 잠을 잘 수 있고, 동네 레스토랑에 가면 에피타이저-본식-후식에 와인까지 나오는 순례자 디너 메뉴를 8~10유로 정도에 대접받을 수 있게 되었다.
어디 그 뿐인가. 조개껍데기가 달린 내 배낭은 길에 놔두어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 것이고, 이 낯선 이에게 현지 주민들은 한없는 친절을 배풀 것이며, 신부님이나 수녀님은 무교인 나에게 정성껏 기도를 해줄 것이다. 조개껍데기를 달고 있는 모든 이들은 친구가 될 것이고, 'Buen Camino!'라고 웃으며 인사를 건넬 것이다.
달랑 2유로에 이렇게 과분한 대접을 받아도 되는 것일까. 이 길을 걷겠다고 멀리서 왔다는 사실 자체로, 이미 나는 이 커뮤니티에 받아들여진 듯 하다.
도대체 이 길이 어떤 길이길래?
드디어 시작이다.
알베르게의 아침메뉴의 상징인 ‘대접’ 커피와 다소 푸석한 빵을 먹고 길을 나섰다. 근처 까르푸에서 박스를 주워 우체국에서 짐을 부친 후에야 순례자의 첫 걸음을 뗄 수 있었다. 배송료 60유로 정도에 그 무거운 짐을 덜어낼 수 있다니, 떠나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가벼운 몸으로 점심거리를 챙겨 오르막 길을 올랐다. 마침 비가 그치고 햇살이 비추었다. 양이 풀을 뜯고 있는 평화롭고 아기자기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순례자로서의 앞날이 이렇게 꽃길이려나?
보통 프랑세스 순례길의 첫날은 피레네산맥의 국경을 넘어 스페인 론세스바예스에서 묵는데, 무려 27km를 걷는데다 가장 고도차가 커, 전 일정 통틀어 가장 힘든 구간이다. 우린 우체국을 들러야 하는 바람에 늦게 출발해서 8km 지점의 Orrison이라는 숙소에서 묵기로 했다. 이렇게 우린 남들이 28~30일 정도 걸리는 까미노를 우리만의 속도로 40일만에 겨우 완주하게 된다.
첫날의 저녁 식사 또한 좋았다. 뜨거운 수프와 돼지고기 수육, 콩스튜파이에 와인까지- 푸짐한 메뉴에, 퀘벡에서 온 순수미가 넘치는 아저씨와 스위스에서 까미노를 시작해 총 1,600km를 걸을거라는 할아버지, 페루, 과테말라, 콜롬비아에서 스페인으로 유학 온 학생들 등, 각양각색 순례자 18명이 오붓한 식사를 했다. 밖은 산바람에 추웠지만 안은 유난히 따뜻했다. 앞으로의 길이 기대되는 첫날이었다.
꽃길은 다 얼어죽었나?
첫날의 설레임은 정확히 다음날부터 사라지게 된다.
출발했던 날이 4월 10일이었는데, 아무리 이른 봄이라 하더라도 태양으로 유명한 스페인인데- 그 다음날 피레네 산맥을 넘으며 무려 눈보라(!)가 뺨을 때렸고, 이후 몇 주간 비가 오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습한 추위에 오돌오돌 떨며 잠에 드는 날이 이어졌다. 비옷은 교복입듯 매일 입었고, 물이 새지 않는 등산화 따윈 준비하지 않았으므로 매일 숙소에 도착하면 젖은 운동화에 신문지를 넣어 말려야 했다. 늘 흐린 날씨의 영국이나 독일에서 온 친구들은 오히려 자기네 나라는 지금 해가 떴다며 억울해했다. 유럽친구들도 예상 못한 혹독한 날씨는 꽤나 오래 지속되었다.
게다가 피레네산맥을 넘어가는 둘째 날부터 나의 오른쪽 무릎의 통증이 시작되었고, 이는 종착지인 산티아고까지 날 따라다녔다. 운동을 1도 안하다가 갑자기 하루 20km를 걸었으니, 탈이 날 수 밖에 없었을 터. 포기를 생각할 정도였지만 동행인의 양해를 구하고 쉬엄쉬엄 걸었다. 나중에는 통증마저 친구처럼 익숙해졌다. 그렇게 남은 무릎 탈탈 털리며 800km를 걸어 가게 된다.
순례자라는 이름에 정이 들기도 전에, 당장 날씨와 몸이 도와주지 않으니 무엇에다 원망을 해야 할지 몰랐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이니 더욱 그랬다. 순례자가 되고 둘째날부터 며칠은 그렇게 몸과 멘탈이 만신창이였던 것 같다.
...이런게 순례지 뭐.
순례란 종교적 의무 또는 신앙 고취의 목적으로 하는 여행을 말한다. 생각해보면 순례라는 것이 예수님, 부처님의 고행이나 오체투지와 비슷한 행위가 아닌가? 원래 순례는 이런 것일텐데 난 뭘 기대했던 걸까. 비가 오지 않았더라도 더워서 힘들었을 테고(여정의 후반엔 더위가 말썽이었다), 초반 무릎이 괜찮았더라도 다른 곳이 탈이 났을 것이 틀림이 없다. 무릎 때문에 남들보다 천천히 순례길 중간쯤 도시에 있는 큰 알베르게에 도착했는데, 몇몇 우리를 앞질러 간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첫날 우리보다 늦게 출발해서 빨리 가버린 건장한 미국애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치료를 받고 있었고, 생장 숙소에서 까불거리던 멕시코 아이는 어딘가 아픈 낯빛으로 나타나 밤에 비명을 질러 같은 방에서 자던 순례자들 모두를 깨웠다. 순례길에서는 누구나 고비를 겪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세상 혼자인 것처럼 비를 쫄딱 맞은 날의 알베르게는 유난히 따뜻했고, 피부까지 탈이 났을 땐 알베르게 주인 아주머니가 용하다는 볼리비아 연고를 챙겨주었다. 숨이 깔딱깔딱 할 때마다 간이음식점인 Bar의 간판이 여지없이 보였고, 따뜻한 카페콘레체나 초콜라떼를 마실 수 있었다. 늦게 도착해 알베르게 침대가 꽉차 멘붕이었을때는 매니저인 호스피탈레로가 기적처럼 간이 침대를 툭 내주었다. 한번씩 순례자들이 직접 준비해서 저녁식사를 함께 해먹는 날엔 다들 잔뜩 털어놓는 고생담이 그저 웃기기만 했다. 이곳의 시련은 딱 버틸 만큼 주어진다는 것을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이곳 사람들은 순례자의 앞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기에, 달랑 2유로를 내고 순진하게 가방을 들쳐매는 순례자들을 이렇게 반겨주는 것 같다. 마치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가 모두 귀엽고 짠한 것처럼.
앞으로의 길이 순탄치는 않을 거야.
그래도 그 마음 그대로 갖고 예쁘게 걸어가.
내가 대신 걸어줄 수는 없지만
열심히 기도해줄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순례자가 되는 경험은 -그저 걷는 것일 뿐인 참 별것 아닌 일인데- 어느새 그 무엇보다 특별한 일이 되어 있었다.
2012 까미노데산티아고 순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