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몰두시켜 일을 끝내고 난
다음의 상쾌함

가시 없는 장미, 이젠 꽃피울 수 있기를.

by 헤르만

Dear. 동생.


어제 내려준 적당한 봄비로 오늘은 길가의 가로수잎들이 말끔히 씻기어 초록의 선명한 색깔을 띄워내다.

얼굴보지 않고 차가운 전화 수화기만 붙들고, 행여 끊길까 걱정하며 안타깝게 전화를 끝내면, 마음은 더욱 중압감을 느끼고, 깔깔해지는 것을 느낀단다. 잦은 전화에 부담을 느끼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목소리라도 듣지 않으면 언니는 곧 견디지 못하곤 하는구나. 그러나 외유내강적인 너를 언제나 믿는 마음은 여전하단다. 늘 잘해나가리라 믿고 있고...

한동안 사고가 마비되어 버린 듯 일 기 한 장, 글한 장 긁적거리지 못했던 것 같다.

대뇌와 손가락 사이의 전달 기관에 심한 고장이 나서 녹이 슬고 심지어 감각이 죽어버린 양 머릿속으로 생각할 수 있고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아무리 애를 써도 문장으로 바뀌지 않았다. 두 눈을 멍청히 뜨고 한 자 한 자 허공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십 년 동아의 한국에서의 젖어들었던 모든 것들이 이곳 일본생활 2년 정도로 서서히 벗기워져 지고 있는 걸까. 나도 모르게 당황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나의 전달기관을 자주 운동시켜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혼잡한 사고로부터, 나의 한국적, 문화적 습성, 사고방식 등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리지 않도록 질서를 만들어야겠다.

학교생활 이야기를 해 줄게. 며칠 전 ‘나가노’라는 곳으로 Fresh Man Camp를 다녀왔다. 우리나라에서는 MT라고 하나.

학교가 가지고 있는 호수(Lake)가 딸린 산장으로, 식당, 회의실, 체육관 등 그 철저한 시설에 또 한 번 놀랐다.

우리 크라스는 D로 E, F 크라스 총 150명 정도가 참가한 대규모의 MT였던 것 같다. 과대표를 하고 있는 덕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를 정도로 혼자서만 이리저리 분주했던 것 같다. 친선 파티의 총사회자를 비롯해 발표회 준비 등, 그리고 비가 내린 덕분으로 체육관에서 반 대항 줄다리기를 하였는데 또 빠질 수가 있겠냐.(솔선수범이 뭔지) 맨 앞에서 손바닥의 허물이 온통 벗겨질 정도로 열을 내고...(3위 마크)(6팀 中). 덕분에 日本 아이들이랑 많이 얼굴을 익히고 친해진 것 같다.

엄마께 MT 갔다 온 이야기를 하니깐 엄마왈:‘너는 너무 열을 많이 내 큰일이다. 조금씩만 열을 내라 얘!’

너의 (반장생활) 고충을 알겠더라. 그러나 무언가 정신을 몰두시켜 일을 끝내고 난 다음의 몸이 뿌드득 커진 듯한 그런 상쾌함은 정말 기분이 좋은 것 같다. 목적을 이루고 난 다음의 찾아오는 어떤 느낌 같을 거야. 너에게도 서울대학의 문이 눈앞에 보인다. 꼭 이루어서 노장의(?) 힘을 만방에 과시하도록. 그날은 온 나라의 사람들이(나 혼자) 반겨 일어나 태극기를 흔들며 즐거워할 것이다.(무슨 해방 축하 문구 같다.) 농담이고.

여름방학이 7/23~9/20까지 인데 언제 갈 것인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단다.

요번 여름에도 무엇인가 의미 깊고 뜻깊은 일을 하고 싶은 바람이다.

뜨거운 여름이 곧 닥쳐오겠지만 더욱더 의지를 굳게 분발시키길 바라며, 건강에 언제나 유의하도록...

너를 언제나 걱정하는 언니로부터...


1992.6.1.日

keyword
이전 14화신의 이름안에서만이 瞬間은 영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