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出發點에 지금 서있다

가시 없는 장미, 이젠 꽃피울 수 있기를.

by 헤르만

보고 싶은 동생에게...


바람이 차다. 목덜미로 파고드는 매서운 바람을 막기 위해 옷깃을 치켜올려도 자꾸 시려지기만 하는 것은... 아주 먼 길을 달려온 것 같다. 짧게 흩어지던 웃음과 뒤섞인 불안.

하고자 하는 것들의 영상들이 자꾸 조소를 띄우며 저편으로만, 저편으로만 튕겨져 가고 있는 듯해서 하지만 앞을 보는 수밖에. 두 눈을 부릅뜨고 말이야. 그 방법밖에는 없었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세상에 내동댕이 쳐진 나의 實體, 나의 이름은 곧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래, 살아있음으로 고통스럽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란 그 고통을 얼마만큼 소화해 내느냐에 달려있는 거겠지. 너도 많이 고생했다. 장하다. 나의 동생!

‘文學’ 아주 감미로운 內部의 유혹이었다. 文化女子大學은 내게 날개 꺾인 ‘새’로 상처주기에 충분했다. 다시 설 수 있는 것이 절대적으로, 아니 다시 날아갈 수 있는 힘이 내겐 필요했었고 목말랐다. 文學은 다른 분야의 知識처럼 事物의 이치만을 깨우쳐 준다든지 사물의 現像만을 살피게 한다든지, 감성이나 감각의 어느 면만을 세련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지식을 전반적으로 흡수하게 하고 인간의 감정이나 심리도 아주 다양하고 심층적으로 통찰케 한다고 본다.

또 하나의 出發點에 지금 서있다. 너도 언니도 힘내자!

일본은 저녁이 되면 갑자기 추워지지만, 오후엔 봄날을 연상시킬 정도로 따뜻할 때가 많다.

지금도 커다란 창문을 통해 비치는 하늘이 맑게 개어 있다. 한국엔 전신주의 줄 위에 참새들이 흔히 눈에 띄지만 일본은 몸채가 커다란 까마귀들이 우글거린다. 별로 귀엽지도 않은 시커먼 까마귀들이 마이야.

유학생들 사이엔 농담으로 처음에 일본에 와 돈 없고 배가 고프면 저 까마귀라도 통구이해서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한다. 그 정도로 큰 까마귀들이 많아. 까마귀는 별로 상서롭지 못한 들짐승인데 일본인들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며칠 전 문화여대에 가서 퇴학증명서 신청을 하고 왔다. 학생증과 더불어 록카의 열쇠도 반납하고, 우연인지 담당교수였던 후쿠오카 선생이 3月달로 학교를 사직한다고 한다. 화가로서 전념하고 싶다는 그의 말, 누구라도 번민과 자신의 일에 대한 갈등을 겪는 것 같다.

교수라는 직책도 그에게 있어서는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무엇이 있었나 보다. 미학의 고이게 여선생도 만나고 전부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文化를 그만두는데도 말이야. 모순이지.

너도 아마 같은 현상을 겪고 있으리라 보지만, 갑자기 목적이 사라진 데에 대한 허탈 내지 공허감, 언니도 조금은 그래서 독어문법기초책을 사다가 공부하려 한다. 들어가기 전에 入門정도는 해두어야겠다 싶어.

너도 유익하게 여가시간들 활용하기를. 머리에 녹이 슬지 않도록. 그럼 또 편지할게-. 건강해-. 안녕.


1993.2.18.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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