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T를 시작하고 남편이 달라졌다. 주말 휴일이면 골프약속을 잡아 라운딩을 가던 사람이 이른 아침 나를 깨운다.
"여보, 운동 가자."
주말인데 쉬어야지 도대체 왜 저럴까. 이불을 당겨 머리까지 덮으며 싫다는 의사표현을 해본다. 남편이 귀에 대고 속삭인다.
"지금 갔다 오면 근육량이 확 늘걸. 나는 살 빠지고."
"괜찮아요. 오늘은 근육들도 쉬고 싶대요."
"같이 시작했으니 같이 해야죠. 정미숙은 바로 침대에서 일어난다. 실시!"
남편의 집요함에 몸을 일으켜 세우지만 귀찮아 미치겠다. 잡히는 모자만 쓰고 따라 나갔다.
오늘의 운동 장소는 249m인 서봉산이다.
트레이너가 산을 다니면 좋다는 말에 온 가족이 주말이면 산에 가고 있다. 이번주는 아이가 약속 있다고 해서 늦잠을 자려고 했다. 남편은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나를 차에 태워 산으로 향했다.
일어나기는 힘들었지만 산에 도착하자, 올라가는 사람들을 보니 또 힘이 난다. 남편과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하고 올라갔다. 비 온 뒤인데도 산길은 괜찮았다. 남편이 가방에서뭔가를 꺼내며 하얀 치아를 드러낸다.
"당신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그냥 걸을 때보다 훨씬 올라가기 쉬울 거예요."
스틱이다. 첫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다 아이에게 체력이 밀렸다.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이기에 나뭇가지를 주워서 지팡이 삼아 걷던 나를 보며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주문했단다. 확실히 스틱을 사용하자, 오르막길이 편안했다. 내리막길도 안정감 있게 내려올 수 있었다. 인정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남편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칭찬해 달라고 한다.
"주문하길 잘했네요. 아주 편해요."
으쓱하는 남편과 함께 다시 산을 올라갔다. 비 온 뒤라서일까. 나무들의 색이 더욱 선명하고 반짝거렸다. 초록색을 좋아하는 나는 금세 기분이 좋아져 남편을 버리고 혼자서 성큼성큼 올라갔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뒤를 돌아본다. 남편이 없다. 기다리며사진을 찍고, 순간을 담아본다.
드디어 남편의 모습이 보인다.
"왜 이리 늦어요?"
"내가 느린 게 아니라 당신이 빠른 거죠?"
"그런가. 실은 학교 다닐 때 별명이 날다람쥐였어요. 친구들과 산에 갈 일이 있었는데 지치지도 않고 산을 타는 모습에 친구들이 지어주었죠."
잊고 있었다. 20대에 나는 제법 산을 좋아했었다. 태백산, 설악산을 여름만 빼고는 올라갈 정도였으니 말이다. 겨울에 간 태백산에서는 내려올 때 썰매를 타고 내려오며 소리를 질렀던 기억이 떠오른다. 하얀 눈꽃의 광경을 보며 감탄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남편과 옛 추억을 떠올리며 걷자, 금세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힘들었던 모든 것들을 잊게 해주는 마법 같다. 뻥 뚫린 모습에 모든 근심 걱정이 날아가는 듯하다. 크게 심호흡을 해본다. 좋다. 맑은 공기가 몸속으로 들어가 정화해 주는 이 느낌이 좋다. 잠시 팔각정에서 가지고 온 사과를 먹으며 쉼을 가졌다.
내려갈 때는 신기하게 시간이 단축된다. 올라온 길을 알아서일까. 입구까지 단숨에 내려왔다. 배에서 밥신호를 보낸다. 지난번에 먹었던 갈비탕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가까운 곳에서 빨리 먹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입구 앞에 식당이 하나 보인다.
"소머리국밥이랑 순대국밥 주세요"
어머나 이게 무슨 일일까. 깔끔하면서 시원한 맛이라니.
"여보, 너무 맛있다."
쫄깃한 식감에 뜨끈한 국물이 허기졌던 배를 따뜻하게 채워준다. 그렇게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순대국밥은 남편이 먹었는데 아쉽다고 했다.)
"그래도 등산하면 국밥 먹어도 된다고 하니까 너무 좋다."
국밥 먹기 위해 등산하는 남편이 귀엽다.
'실은 나도 그래서 등산하는 거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밀가루 음식 먹지 말라니깐 이렇게라도 맛있는 거 먹어야지. 남편 말 듣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