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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덕골 이선생 Jun 05. 2024

불안과 공포로 얼룩진 심연의 세계

린 램지의 <너는 여기에 없었다>

[ 사진 출처: 네이버 ]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조(호아킨 피닉스)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는 청부업자로, 트라우마시달리며 삶과 죽음갈림길에서 헤맨다. 어느 날 보토 의원 니나를 구출해 달라는 의뢰를 받고, 딸을 구해주면 5만 달러를 지급하겠다는 제안을 수락한다.


는 미성년자를 감금한 호텔로  니나를 구한다. 그러나 보토 의원이 자살했다는 뉴스가 보도되자, 니나는 괴한 다시 납치된다. 그 뒤 조의 어머니와 동업자 존스가 무참히 살해된 채 발견된다. 조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뒤 세상을 떠나려 하지만, 니나의 환영을 본 다시 깨어난다.


[ 사진 출처: 네이버 ]
죽지 못해 사는 잉여의 삶


조의 삶은 고통과 불안으로 얼룩져 있다. 폭력적인 환경에서 성장했고,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로 고통받는다. 자살 연습이 일상이 되어버린 조의 삶은 더 이상 희망적이지 다. 감독은 서로에게 총격을 하고 창고에 갇혀 죽어가는 모습 몽타주로 제시하며 전쟁의 참혹함을 전한다. 그 외에도 망치를 들고 있는 아버지와 식탁에 몸을 숨기는 엄마, 벽에 머리를 찧으며 불안에 떨고 있는 조의 모습이 그려진다. 감독이 이러한 이미지를 플래시백으로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의 불안 심리를 사실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의도다. 마치 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다.


'넌 더 잘해야 돼', '미련한 새끼', '나는 나약해"  등의 환청은 내면에 박혀 있는 아버지의 표상이자, 불안한 자의식다.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를 통해 안아주는 환경이 부재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 보여준 가학적 행동은 고통을 버텨내는 수단이다. 통제할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잊기 위해 가학적 방법을 취하는데, 자신뿐 아니라 타인을 향해 공격적 에너지를 투사한다. 먼저 조의 자살 시도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버티려는 강박적 행위로 보인다. 마음의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상처를 다른 방식으로 재현하려 하는데, 반복 강박은 고통을 무디게 하는 방편 된다. 또한 통제와 절제가 강한 인물이기에, 타인에게 무분별한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청부업자로 살면서 제한적 폭력으로 내적 불안을 해결한다.

낙원이 뭔지 알아요? 거짓이에요. 우리가 환상처럼 만들어 낸 사람과 장소들. 가끔은 태어나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울었어요. 날 완전하게 해 줬을 아이들. 하지만 난 달콤한 삶을 택했고, 달콤한 삶도 씁쓸할 줄은 알지 못했죠. 난 호기심 많은 삶을 살았고, 자유로워지기까지 많은 대가를 치렀어요. 난 낙원에도 가봤지만 나에게 가본 적은 없어요.   <노래 가사 >


[ 사진 출처: 네이버 ]
불안과 공포로 얼룩진 심연의 세계


감독은 내가 살기 위해 누군가를 헤쳐야 하는 아이러니 삶,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이 어울리는 그의 안타까운 인생을 파편화된 이미지로 설명한다. 가장 아이러니한 장면은 어머니를 죽인 괴한을 제압한 뒤 취하는 그의 행동이다. 조는 괴한 곁에 누운 노래를 흥얼거린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의 손을 붙잡아주는 의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은 폭력에 대한 분노와 공포, 죄책감과 연민, 자유로 얽혀진 내면의 형상이다.

 

폭력과 착취에 노출된 니나에게 안타까움을 느끼는 조. 는 니나를 구하기 위해 달려가지만, 그녀폭력을 행사한 인물을 죽인 뒤 여유롭게 식사를 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인물로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당당히  폭력에 맞선다. 또한 조가 니나에게 달려가듯, 니나 역시 죽어가는 조에게 손을 내민다. 조에게 아름다운 날이라며 인사를 건네는 니나, "아름답구나"라고 답하는 조의 모습에서 희망적인 미래를 엿볼 수 있다.


 [ 사진 출처: 네이버 ]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인물의 내면 심리를 탐구하는 감독의 특유성을 잘 반영한 영화다. 서사에 치중하기보다 폭력과 불안으로 얼룩진 조의 심연을 따라 조용히 흘러간다. 은유적 이미지, 조각된 이미지를 나열하고 있어, 퍼즐 맞추기가 요구되는 영화다. 그래서인지 배우의 명연기에도 불구하고 불친절한 영화로 인식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기도 한다. 

  


본 영화는 친절하진 않지만 좋은 영화임에 틀림없다. 인간 내면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영화다. 또한 '어린 소녀를 구하는 아저씨'를 표방하지만, 공포와 불안으로 얼룩진 인간 내면을 보여주는 심리극이다. 동시에 낙원이라는 환상에 이끌려 살아가는 인간에게, '구원할 자는 나 자신뿐'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결국 '너는 여기에 없었다'라는 말은 상처 입은 자에 대한 위로인 동시에 자신을 향한 구원의 의지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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