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모래사장에서 라면을 먹다

by 남효정

나의 캠핑카 파란 바람을 타고 멈춘 곳은 숲을 등에 지고 있는 바닷가다.

S시를 빠져나와 남쪽으로 일곱 시간쯤 달렸을까.

은빛 고운 모래와 바다, 울창한 소나무숲이 펼쳐진 장소가 눈앞에 펼쳐졌다.


반달모양으로 펼쳐진 약 2킬로미터의 백사장을 나는 맨발로 걸었다.


보드라운 잔모래가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온다. 간질간질 가재가 발을 간질이는 듯 웃음이 나. 그리 차갑지 않은 바닷물도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파란 바람을 타고 온 첫 번째 장소가 이곳이라는 것이 무언지 모르게 안온한 느낌을 선사한다.


파란 바람 소나무 아래 서 있다.

열심히 달리면 발바닥이 뜨거워진다는 것을 나는 내 손으로 돈을 벌어 용돈을 쓰기 시작하던 그 시절에 진작 알아버렸다.


하루 종일 종종 거리면 열이 나는 거야.


어디서?


발바닥……인덕션 위의 냄비가 조금씩 데워지듯 시나브로 온도가 올라가.


거참 신기하다 너의 신체구조는! 피곤할 때 나는 다크 서클이 내려오고 눈의 초점이 잘 맞지 않는 정도인데.


별이는 내가 있는 방향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웃었다. 이럴 때 보면 꽤 맑은 면모도 있구나 싶다.


뭔가 나는 다른 거 같아. 아주 도시적인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 콘크리트 도시에는 맞지 않는 그런 심장을 갖고 있는 거 같아.


별이는 생각에 잠긴다. 나의 이야기의 순도를 높이겠다는 듯이 의자를 당기고 턱을 괸다.


여기 심장이 있잖아. 심장이 규칙적으로 잘 뛰어야 건강하지? 나는 그 안에 또 하나의 심장이 있는 것 같아. 대숲 바람소리나 파도소리, 숲의 싱그러운 나뭇잎 냄새 등에 과하게 반응하는 심장 말이야.


아, 정말 멋진 이야기인데.

심장 안에 심장이라……


콘크리트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박동하는 심장 안에는 이 도시를 벗어나면 싱싱하게 펄떡거리는 심장을 감싸 안고 있다. 물고기의 펄떡거림, 비 온 뒤 나무의 싱그러움,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는 물길들...... 나는 장황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고 별이는 끝까지 내 말에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마지막에 나는 파란 바람을 타고 길을 떠날 거라고 말했던 것 같다.



나는 지금 은빛모래사장에 캠핑의자를 놓고 바다를 보고 있다. 촉촉하게 젖은 모래의 부드러움이 발가락을 타고 나의 온몸으로 퍼진다. 파도가 밀려와 발이 바닷물에 담가진다. 일어나 의자를 한쪽으로 치워놓고 쪼그려 앉는다. 모래 위에 손을 올린다. 파도가 밀려와 내 손까지 닿는다.


이 물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내가 이 바닷물에 손을 담그는 순간 나는 지구촌 곳곳의 모든 물과 이어진다는 생각이 들어.


노을이 지고 있다. 나의 마음에 오렌지빛 노을이 스민다. 노을이 질 때 바닷가에 있는 것만큼 멋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이 든다. 나의 시작과 끝에 대한 생각을 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별이랑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 학교에 들어오기 위해 내가 하고 싶은 모든 것들을 뒤로 미뤘어. 놀이터에서 모래놀이를 하고 싶은 마음까지도 말이야. 해도 해도 끝이 없는 학원숙제에 지쳐 잠이 들면 어김없이 아침이 왔어. 몸은 천근만근 무겁고 어제의 구김이 그대로 남은 교복에 몸을 밀어 넣으면 똑같은 하루가 반복돼. 그건 부인하기 어려운 어떤 무서운 마법 같았어.


또야, 햄스터 키워본 적 있어? 챗바퀴를 돌며 날마다 같은 하루를 살잖아. 내려와서 다른 걸 해도 되는데 꼭 챗바퀴를 반복해서 돈단 말이야. 무심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습관적으로. 우리도 그렇게 살도록 길들여진 건가. 그런데 난 햄스터처럼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 그리고 차갑고 슬픈 어떤 공간 속으로 떠밀려 들어가는 것만 같아. 어느 날 햄스터를 가만히 바라봤어. 그 얘는 괴로워 보이지 않아. 오히려 어떤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아. 익숙한 것에 대한 편안함일 수도 있고.


그때 나는 별이의 공허한 눈빛을 보았다. 고단하고 충혈된 눈을 보았다. 내 눈을 지나쳐 우주의 빈 공간을 보는듯한 그 눈빛이 마음속에 잔상으로 남아 나는 한동안 신경이 쓰였다.


해가 진다.

바닷물은 점점 오렌지색으로 변하다가 검붉은 빛깔로 사라진다. 텐트에 밝힌 등이 빛난다. 사라진 별이를 생각한다. 나는 발에서 열이 난다는 이야기를 오래 했고 별이는 고대 체로키 인디언 이야기를 했다.


너, 고대 체로키 인디언의 '두 마리 늑대 이야기' 알아?

할아버지가 손자를 앉혀 놓고 이야기해.

'우리 마음속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살고 있단다. 그리고 이 두 마리 늑대는 항상 싸우고 있지'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왜 싸우냐고 물었어.

할아버지가 뭐라고 했을까?


그때 나는 피곤하기도 하고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 같이 느껴지지도 않아서 대답했다.


글쎄. 배가 고파서였을까? 동물들은 대부분 먹이 때문에 싸우잖아?


별이는 테이블 위의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빨대로 쪽 한 번 빨고는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진지하게 말을 이어 갔다. 나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진지하게 말해.

'검은 늑대는 악이다. 그 녀석은 화, 질투, 슬픔, 후회, 욕심, 오만, 자기 연민, 죄책감, 억울함, 열등감, 헛된 자존심, 우월감을 가지고 있단다. 반면, 하얀 늑대는 선이다. 그 녀석은 기쁨, 평화, 희망, 평온함, 겸손, 동정심, 친절, 자비, 공감, 너그러움, 진실, 연민이지.'

듣고 있던 손자가 물어 '할아버지, 어떤 늑대가 이겨요?'

'네 안에서 싸우는 늑대는 네가 밥을 주는 쪽이 이긴다.'


나는 말했던 거 같다. 내가 말한 두 개의 심장이야기랑 그 이야기랑 무슨 상관이냐고. 별이는 나에게 말했다. 분명 상관이 있을 거라고. 아니면 상관 지어 보라고 애애모호한 말을 남기고 카페를 나갔다.


어디로 꼭꼭 숨어버린 거야.


나는 중얼거린다.

코펠에 물을 넣고 끓기를 기다린다. 조용한 물은 조금씩 기포들을 만들어 올린다. 기포들은 점점 힘센 아이처럼 요동치더니 공기방울들은 서로 부딪히며 터진다. 이럴 때 보면 물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뜨거운 김이 올라온다. 나는 매운 라면 하나를 넣고 뚜껑을 닫는다.


다시 생각에 잠기는 시간.

저 바닷물에 손을 담그면 내가 지구별 전체의 물과 이어지는 느낌이 드는 것처럼 별이와 나는 어떤 끈으로 단단하게 이어져 있는 것 같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하다가 냄비 뚜껑을 연다. 작은 물방울을 만들며 라면에게로 돌진하던 물은 면발을 반투명하게 만들고 국물에서 나는 매운 향신료 냄새는 노을 진 바닷가에 편안한 안식의 공간을 만든다.




#은빛모래사장 #노을 #학원 #챗바퀴 #햄스터 #남효정 놀이와 교육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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