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사랑방
하늘이 점점 흐려지더니 급기야 주위가 깜깜해집니다. 일요일 오전, 초록빛으로 물든 떡갈나무 숲을 남편과 산책하려고 길을 나섰는데 안 되겠습니다. 금방이라도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질 것 같아요.
"여기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하늘을 살펴보자. 집중 호우가 내릴 거 같아."
주위가 어두워지자 본능적으로 규모가 큰 환한 카페로 들어가게 됩니다. 평소엔 자그마한 카페 창가에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다면 오늘 같은 날엔 무조건 크고 환한 곳, 그리고 사람이 여럿 앉아 있는 카페가 편안합니다. 창가 바로 옆 테이블이 만석이라 바로 옆에 자리를 맡고 주문을 하였습니다.
"여기는 별이 표시된 스타벅스니까 오늘의 커피를 마시자."
"그래, 오늘의 커피는 맛이 깔끔해서 좋더라."
"생크림카스텔라도 하나 할까?"
"웅, 좋지."
'오늘의 커피'는 주문이 들어오면 일정량의 분쇄된 원두를 별도의 가압없이 종이로 만들어진 필터에 넣고 온수를 조금씩 흘려보내 만드는 방식으로 브루밍이라고 부르며 가정에서 주로 하는 핸드드립 방식과 유사하다고 합니다. 스타벅스 커피가 로스팅이 강하고 쓴맛이 많이 나는 것이 특징인데 오늘의 커피는 싱글 또는 브루밍에 적합한 몇 가지 원두를 섞은 블렌딩으로 깔끔하고 독특한 풍미가 있습니다.
"오늘의 커피는 준비하는데 5분 정도 걸려요. 괜찮으세요?"
"네, 괜찮습니다."
커피가 만들어지는 사이 창문 바로 옆 테이블의 손님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창문 옆 자리 동그란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앉았고 마침 픽업대에 주문한 커피가 준비되었다는 알림이 왔습니다. 남편이 가져다준 따뜻한 커피와 달콤한 생크림 카스텔라 너머로 폭풍우가 시작됩니다.
봄날 그렇게 사랑스러운 벚꽃을 휘날리던 나무, 이제 무성한 초록잎을 달고 휘몰아치는 바람과 비에 뽑힐 듯 휘청거립니다. 우리는 호호 불며 뜨거운 커피를 마십니다.
"와, 나무 좀 봐. 괜찮을까?"
"이 정도로는 괜찮을 거야."
"가지가 길고 나뭇잎이 많을수록 바람에 취약하네."
"가만히 보면 춤추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해."
별것 아닌 소소한 대화를 우리는 참 많이도 합니다. 읽은 책 이야기, 일하다 생긴 속상한 이야기, 돈 버는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 시골 가서 살아볼까 하는 이야기......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칠 줄 모르는 비처럼 계속됩니다.
저쪽 우리 자리 사선으로 건너다 보이는 테이블에는 4세 정도의 남자아이와 젊은 엄마가 보입니다. 엄마는 음료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시간에 가방에서 한글 낱말카드를 꺼냅니다. 코팅된 카드에는 오징어, 바나나, 사과 같은 낱말이 쓰여 있고 엄마는 하나씩 넘기면서 한글을 가르칩니다. 멀리 있어서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창밖에 비가 세차게 내리고 오월의 나무는 올해 들어 가장 역동적으로 움직입니다.
아이는 어두워진 하늘과 창밖의 모습을 보다가 엄마가 내미는 낱말카드에 쓰인 글자를 읽습니다. 창밖 풍경이 궁금한 점도 많고 신기하기도 할 텐데 엄마는 챙겨 온 낱말카드 안에 아이의 경험을 가두는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함께 창밖을 보고 아이가 궁금해하면 잠깐 밖에 나가서 바람을 경험하고 느껴보도록 한다면 얼마나 큰 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지금이야말로 신기한 대기의 이동과 오감을 자극하는 오월의 나무에서 생동하는 에너지와 과학적 호기심이 함께 꿈틀거릴 기회인데!'
비는 거세어지고 맞은편 작은 카페의 젊은 사장은 밖에 펴놓은 파라솔을 접고 야외용 의자를 안으로 들여놓은 뒤 카페의 불을 모두 다 끈 후 커다란 까만 우산을 쓰고 총총 퇴근해 버렸습니다.
여기 커다란 프랜차이즈 카페엔 사람들이 많습니다. 책을 보는 사람, 무언가를 끊임없이 쓰는 사람, 커다란 헤드폰을 쓰고 유튜브를 보는 사람, 줌(ZOOM)으로 회의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처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 가장 많은 것으로 보아 카페는 마을의 사랑방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머니들끼리 모여 아이들의 사교육을 걱정하고 나이 든 노부부가 들어와 우유가 듬뿍 들어간 라떼를 마십니다. 말은 별로 없지만 가만가만 나누는 이야기들이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대화에도 색깔과 에너지가 있어서 이 공간에서 섞이고 휘돌아가고 용솟음치는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어떨까?"
"공간에 입체 예술품이 생기는 거지."
"한글공부하는 저 아이는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을까?"
"아이의 마음을 색과 에너지로 보여줄 수 있다면 그래서 부모가 바로 그것을 알아볼 수 있다면 얼아나 좋을까? 좀 더 잘 소통할 수 있을 거 같아."
"하지만, 아이를 잘 관찰해 보면 아이의 마음을 잘 읽을 수 있어. 그 마음을 수용할 것인지 아닌지는 오롯이 부모의 몫이잖아."
비바람은 잦아졌다가 다시 거세어지고 다시 잦아졌다가 거세어집니다. 우리의 이야기도 그러합니다.
"올해는 지리산 둘레길을 꼭 한 번 걷고 싶어. 너무 더워지기 전에 다녀와야지 기온이 올라가면 오래 걷기 힘들 테니까. 시간 내서 꼭 다녀오자."
"그래, 시간을 맞추어 보도록 하자."
"강원도 양구도 참 좋대. 공기도 맑고 자연풍광이 아주 수려하대. 거기 금강산로가 시댁인 분이 나중에 그곳으로 귀농한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멋진 곳이더라고."
"이곳저곳 발품을 팔아 다녀봐야 할 것 같아. 어느 곳이 좋은지 이제 슬슬 알아보러 다녀야지."
"둘레길 걷기도 자동차 여행도 우선 운동하고 건강을 챙겨야 너끈하게 다녀올 수 있을 거 같아. 지금은 의욕이 대단하지만 그에 비해 체력이 너무 약한 거 같아......"
진한 커피 향이 퍼지는 사랑방. 2024년 5월 11일 폭풍우 치는 날에 커다란 우리 동네 사랑방에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 빨주노초파남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창밖에는 바람이 불고 나무는 힘차게 춤을 춥니다. 떡갈나무 숲은 더 싱그러워지고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