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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글몽글하고 부드러운 것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by 도인

"그래서 대체 왜 씨엠립이야?"


오랜만에 길상사를 둘러보고 내려오며 친구가 묻는다. 뭐라고 대답할까 잠시 망설였다.


"그냥 물가가 저렴해서."


진심을 감춘 채 둘러댄다. 사실은 안다. 언제나 나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친구의 마음을. 그 마음을 외면할 수 없어서, 그저 말끝을 흐린다.


하지만 내가 씨엠립에 온 진짜 이유는 H다. H는 내가 다시 만나고 싶은 궁금한 사람이다. H 역시 이미 영국에서 아시아로 넘어와 내 한국 일정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함께 보내기 위해 잠시 영국으로 돌아갔던 H를 다시 만난 건 거의 3개월 만이다. 연락은 꾸준히 주고받았지만, 물리적인 조우는 늘 낯설다. 사람을 낯설어하는 나로서는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어제 나라를 이동하는 긴 비행으로 피곤해서는 오늘은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카페를 찾아 밖으로 나섰다. 캄보디아의 무더운 날씨가 다시 재현될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덥지 않았다. 작년 여름을 체감 온도 50도의 이집트 다합에서 보냈던 나는 이제 더위에 조금 익숙해졌는지도 모른다.


미리 찾아둔 숙소 근처의 작은 카페에서 코코넛 커피와 늦은 점심을 시켰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꼭 마셔보고 싶던 그것. 첫 모금을 마시자마자 나도 모르게 말했다.


“부드럽다.”


그 말이 그냥 튀어나왔다. 코코넛 밀크와 크림이 녹아든 그 풍미는 정말이지 풍부하고 부드러웠다. 쓰디쓴 아메리카노만 고집하던 내가 이렇게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에 마음을 연 것은, 어쩌면 내 안에 있던 어떤 딱딱함이 조금씩 풀려가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요즘 자꾸 ‘부드러움’이 좋다. 단순한 맛이나 질감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도, 관계도, 말도, 감정도. 뭔가 몽글몽글한 것. 그런 것.


천천히 먹고 마시고 더 늦은 오후의 씨엠립 강변을 따라 함께 느긋하게 걸었다. 제주에서 흔히 보는 나무가 귤나무이듯 여긴 망고 나무가 흔하게 보인다. 주렁주렁 매달린 초록 망고가 마음을 넉넉하고 풍요롭게 했다. 시장을 구경하며 참깨를 뿌려 구운 돼지 머리 고기와 튀겨지는 여러 곤충을 구경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씨엠립 강에 다다랐다. 강변은 저녁식사를 즐기는 현지인들로 가득했다. 둘이 서서 석양에 물들어 부드러운 색으로 덮인 씨엠립 강을 지긋이 바라봤다.


조용하고 젠틀하며 무엇보다도 부드러운 나의 친구 H. 나는 아마 H와 오래도록 함께 시간을 보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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