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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효진 May 04. 2017

2. 다양한 경로와 이슈들 (2)

(이전 글에서 소개한 ‘미국 유학생 와이프’들의 대표적인 경로들 중 두 가지에 이어 나머지 세 가지의 경로와 이슈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과도기를 보내는 모습들이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생활과 진로에 대한 고민과 행보를 중심으로 분류한 경로들입니다.)


며칠 전에 목격한 광경. 어떤 사람은 기차 위를 달린다..!

2.3. 나의 일을 계속 이어가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격동기


내 일을 계속 이어가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격동기의 대략적인 경험의 흐름과 감정 상태

자신의 진로를 계속 이어가기 위한 직장이나 학교가 확실히 정해지지 않았거나 취업을 할 수 있는 신분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에 온 후 바로 일을 찾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경우도 있다. 자신의 실력과 경력에 자신이 있기 때문에 미국에 오는 것이 그리 걱정스럽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전문 분야의 산업이 활발하지 않은 지역으로 이주한 경우나 취업비자의 현실에 대해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던 경우, 구직을 하며 시행착오를 겪으며 실망을 거듭하게 된다.


좌절과 불안


현실이 기대대로 풀리지 않으면 좌절과 불안을 겪기 마련이다. 특히 공부보다 취업을 기대했던 경우, 본국에서 살면서 체감할 수 없었던 신분의 의미를 절감하게 된다. 한국에서 의사, 약사와 같은 전문직에 있었다 해도 거주 국가를 바꾸는 경우 해당 국가의 규정에 맞춰 자격과 면허를 다시 갖추는 과정이 필요하다. 어쩔 수 없이 내 일을 그대로 이어갈 수 없는 기간이 생기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 시간은 내 일을 다시 찾기 위한 격동기가 된다. 강하게 원하나 자신의 일을 할 수 없게 된 당혹감 때문에 이 경우 다른 네 개의 경험 곡선에 비해 감정의 진폭이 크다.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에 온 후 4년 가까이 취업을 준비해온 진주 씨도 같은 경험을 했다. “초반에는 사실 너무 모르기 때문에 가면 직장을 금방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걱정이 오히려 없었어요. 미국에 대해서 몰라서, H-1B 비자 서포트받는 게 큰 이슈라고 생각을 못해서. 리서치가 부족했던 게 있었던 것 같아요. 비자의 현실을 깨닫는 데 몇 개월 안 걸렸어요.”


현실적인 계획 추진과 안정


내 일을 다시 이어가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경우, 불안과 혼란이 컸지만 회복의 탄력성 또한 높았다. 현실을 파악하고 가능한 방법을 찾고 이전보다 현실적인 목표와 실현 가능한 계획을 만들고 준비하면서, 요동치던 감정도 가라앉고 오히려 긍정적이 됐다. 목표를 구체화하고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면서 생활도 안정됐다. 다시 직업을 갖게 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해도 그 시점까지 내가 해야 할 일이 명확해졌으므로 불안의 크기도 줄었다. 다만, 진로 준비는 또 다른 일이므로, 가사와 육아를 병행하며 자신만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과 협조가 필요했다. 진주 씨 역시 격동기를 거치며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며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방향이 정해지기 전에 여기에서 학위도 없이 취업해야 된다고 생각한 시기에는 엄청 막막하고 불안함이 있었는데, 학위 없이 취업할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하며 어느 정도 계획이 잡힌 다음부터는 불안한 건 좀 없어요. 어느 정도 제 포트폴리오가 쌓이고 지난 경력이 아예 관련이 없는 게 아니어서 플러스되는 부분이고. 그런 걸 어필하면 다른 분야에 비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루틴이 정해진 다음부터는 몸이 힘들어서 그렇지 기분은 괜찮은 것 같아요. 조금이라도 깊게 들어가려면 작업해야 할 게 많기 때문에 불안한 것보다 바빴어요.”


2.4. 정해진 계획 안에서 살며 여유를 즐기는 시간


정해진 계획 안에서 살며 여유를 즐기는 경우의 대략적인 경험의 흐름과 감정 상태

이전 직장을 그만둔 후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이를 위해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이미 고민과 계획을 끝내고 오는 경우가 있다. 직업을 가진 상태에서 다가올 미래를 준비했기 때문에 불안감이 덜한 상태에서 구체적인 계획을 준비해올 수 있다.


계획 안에서 여유로운 시간


쉬는 시간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을 끝내고 계획을 세운 경우, 쉬는 시간은 혼란스럽지 않다. 고민과 계획을 앞서 했는지 여부가 차이를 주는 부분이다. 고민을 미리 했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쉬는 시간을 시작하는 동시에 일상생활의 구조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게 된다. 계획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바쁠 때와 여유로울 수 있는 때를 구분할 수 있는 유연함이 주어진다. 계획으로 인해 불안하지 않고 계획 안에서 기쁜 마음으로 게으를 수 있다. 임신과 같은 변화가 생기는 경우, 새로운 계획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세운 계획의 시기를 조정하게 된다. 미국 수의사 면허를 준비하면서 출산을 기다리고 있는 수정 씨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저는 제 스스로를 재충전하는 좋은 시간이라 생각해요. 쉬는 시간은 5년 정도 예상하고 있어요. 그 사이에 아기를 낳고 키우고 틈틈이 공부를 해서 미국 수의사 면허를 마저 따자.”


경력 상 애매할 수도 있는 시간


그런데 계획 안에서 살고 있다 하더라도 진로를 위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시점이 먼 미래이거나 몇 년 후 남편의 진로가 확실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경우, 기다리는 지금 이 시간이 애매할 수 있다. 여유롭게 지내는 것은 좋지만 내 일에서 멀어져 몇 년의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기에 마음이 편치 않게 된다. 한국에서 치과의사로 일하다 온 연진 씨도 1년 넘게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 방향을 두 가지로 잡고 있는데, 만약 한국에 돌아가게 되면, 여기서 아예 공부를 안 하고 그냥 쉴 생각이고요. 만약 남편이 직장을 미국에서 잡아야 된다면, 그때 남편이 직장을 잡고 나서 제가 공부를 시작할 생각이에요. 제가 미국 치과의사 면허를 받으려면 여기서 공부를 2년 더 해야 되거든요. 하지만 아직까지는 미국에 남을지 말지도 결정된 게 아니라 지금 준비할 필요도 없어요.”


2.5. 육아에 집중하며 향후 진로의 방향성 고민

 

육아에 집중하며 향후 진로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경우의 대략적인 경험의 흐름과 감정 상태

미국에 오며 당분간 내 직업을 갖지 않고 육아에 집중하기로 우선순위를 정하고 오는 경우가 있다. 한국에서라면 여러 도움을 받으며 회사를 계속 다녔겠지만, 해외에서 부부와 자녀만 있는 경우 자신의 진로와 육아 사이에서 선택권이 없어지게 된다.


가정을 위한 우선순위 결정


20대 후반 ~ 30대 중반 사이의 여자들에게 자신의 진로를 인생의 우선순위에서 낮추는 것은 익숙한 상황이 아니다. 조남주 작가가 ‘82년생 김지영’에서 썼듯이 “남자아이들과 다름없이 적성을 고민하고, 직업인으로서의 미래를 계획하고, 그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고 경쟁”해온 여자들은 미국에 와서도 남편과 동등한 직업인으로서의 자신의 미래를 그린다. 그러나 육아의 부담이 높은 경우, 특히 어린 자녀가 둘 이상인 경우, 진로와 육아 사이에서 고민을 이어가다 어쩔 수 없이 가정을 위해 우선순위를 새로 정하게 된다. 아들 둘을 키우며 당분간 육아에 집중하고 있다는 수경 씨가 말했다. “아쉽거나 후회되는 부분은 없어요. 왜냐하면 고민을 했는데 이게 시행착오를 겪어서 애들을 보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시도를 안 해본 것도 아니고. 그래서 지금 안정을 찾았고 내가 지금 안 한다는 것에 대해 불안감을 날려버렸으니까 되게 좋아요.”


장기적인 진로 고민


육아를 위해 진로를 잠시 미뤄둔다 해도, 대개의 경우 ‘몇 년 후 육아의 부담이 줄어들 때까지만’과 같이 한시적으로 가정에 전념하기를 원한다. 다시 공부를 해서 진로를 재개하는 시점 역시 가정의 경제적 상황을 고려해 남편의 취업 후를 기약하는 현실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는 ‘현재의 나’는 몇 년 후에 살게 될 ‘미래의 나’를 위해 관심 가는 분야와 가능한 진로에 대해 계속적으로 고민하고 탐색한다. 수경 씨 역시 다음 진로에 대해 여러 가능성을 생각하며 남편과 의논하고 있었다. “남편은 일단 지금은 내조를 잘해달래요, 자기가 연구에 집중할 수 있게. 예전에는 너도 빨리 자리를 잡자 해서 TOEFL 공부 스터디하는 거랑 책도 많이 사다 주고 이랬는데, 애들이 있으니까 같이 뛰어들면 뭐도 안된다는 걸 본인도 깨달은 거예요. 빨리 자기가 자리를 잡고 그다음에 너를 밀어줄 테니 그때까지는 이게 너의 일이다. 육아, 가사가 너무 어려운 일이니 이걸 잘 맡아달라. 학교를 다니면 연락 오는 게 정말 많아요, 학교 행사나 발룬티어. 다 커버하는 것도 힘든 것 같아요.”


미국에 오기 전에 서로 다른 삶을 살았던 11명의 사람들은 ‘미국 유학생 와이프’가 되어서도 그 사람 다운 자기만의 길을 걸었다. 그렇지만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며 비슷한 배움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보다 일찍 계획하고 고민했으면 덜 힘들었을 텐데’라는 후회와 ‘길이 보이지 않고 겁도 많던 시기에 우선 살아보고 시도해봤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곳에서 긴 시간을 보내며 학교로 돌아가고 일을 다시 시작한 사람들은 말했다. 이런 시간이 있었기에 공부와 일이 내게 필요하다는 걸 배웠고 그 시간이 있어서 지금 내가 더 잘할 수 있게 됐다고. 20~30년을 감싸주던 보호막이 없어진 채로 타지에서 일과 가정이라는 두 개의 도전에 맞서는 시간은 성숙의 시간이자 회복의 시간으로 기억됐다. 그렇지만 막막하고 괴로웠던 방황과 혼돈의 시간은 되돌아 기억해봐도 역시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는 참고서' 목차 및 이전 글 보기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는 참고서' 소개
1. 배경

    1.1. 우리 안의 ‘미국 유학생 와이프’

    1.2. 기대와 다른 현실

    1.3. 이상한 나라를 만드는 요인들
2. 다양한 경로와 이슈들

    2.1. 새로운 진로를 찾는 거대한 고민

    2.2. 현재 직장과 새로운 가능성 사이에서 고민과 저울질

    2.3. 나의 일을 계속 이어가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격동기

    2.4. 정해진 계획 안에서 살며 여유를 즐기는 시간

    2.5. 육아에 집중하며 향후 진로의 방향성 고민
3. 11명의 ‘미국 유학생 와이프’들에게서 찾은 인사이트
4.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기 위한 지침


월요일, 목요일마다 업로드 예정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인터뷰 참가자들의 이름은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대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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