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적부터 상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가수가 되거나 선생님이 되는 상상을 했고 오빠가 있거나 멋진 남자 친구가 있는 상상을 했다.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이런 상상을 하며 자신의 세계를 키워나간다. 하지만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서른이 넘도록 나는 이 상상을 계속하고 있었다. 마치 상상에 중독된 사람 같았고 혹시 내가 미쳐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의 상상은 귀여운 어린아이의 장난을 넘어서 망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유명한 사람이 되어 사람들에게 인정받거나 부자가 되어 부모님께 대단하다는 말을 듣거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그런 상상이 망상이 되어 나를 계속 따라다녔다. 그리고 나의 망상들이 더 화려해질수록 나의 현실은 더 비참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망상에 중독된 나는 이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현실 세계에서 상처받을수록 나는 더 강렬한 망상을 탐닉했다. 그리고 현실이 꿈이고 망상이 사실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계속 이 망상 속에 빠져있고 싶었고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망상은 비참한 나의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다.
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된 생각을 우리는 망상妄想이라고 한다. 그리고 망상이라는 단어에는 물에 있는 귀신罔象이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낯은 푸르고 몸과 털이 붉은 이 망상이라는 귀신이 마치 나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망상은 항상 나를 쫓아다녔고 이 귀신이 너무나 교묘해서 나는 내가 망상에 빠져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귀신에게 홀려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인생을 뒤집어엎고 싶을 만큼 강렬한 상처를 받게 되고 가슴이 찢겨 나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내 안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있던 귀신 또한 고통에 울부짖으며 본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망상에 가려져 있던 귀신의 털이 벗겨지자 나타난 것은 바로 상처로 얼룩진 어린아이 같은 나의 모습이었다. 현실에 있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나는 상상 속으로 숨어들어 그 속에서 끊임없이 활동을 하며 계속 현실로부터 도피했다. 현실은 안전하지 않았고 누구 하나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 주지 않았다. 나는 조건 없는 사랑을 갈구했지만 나의 부족한 모습조차 사랑해 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머릿속으로 숨어 들어가 현실을 벗어나 지속적인 상상과 생각을 할 때 비로소 나는 안전함을 느끼는 것만 같았을 것이다.
언제나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다른 어딘가에서, 다른 누군가에게서 찾았던 사랑을 스스로에게 주워야 한다. 때로는 견디기 힘든 불편한 감정이나 고통을 마주했을 때도 현실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조건 없는 사랑으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도망갔던 나의 상처받은 영혼도 제 자리로 돌아오고 나의 세계도 평화롭게 흘러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가끔씩 어떠한 특정 사건으로 인해 스위치가 켜지고 패턴 지어진 생각에 빠져들거나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망상에 빠져들 때면 나는 조용히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곳으로 돌아와. 이곳은 이제 안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