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미 안투네즈 Oct 14. 2022

어느 멋진 하루.

The window by James MacKeown




오늘은 오전에 마당에 떨어져 있는 낙엽들을 쓸어서 옥수수와 토마토 밭에 덮어두는 일을 했다. 처음에는 집보다 넓은 마당의 낙엽을 언제 다 쓸어 담나 하고 낙담했었는데 하다 보니 재미가 붙어서 막상 끝났을 때는 아쉬움이 남았다.


문득 낙엽을 쓸어 담으면서 내가 계속 웃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뭇잎들이 바람에 나부끼며 떨어지는 소리와 모습들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고 맑은 하늘과 따뜻한 햇볕 때문에 채도와 온도가 적당하게 나를 감쌌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북이 쌓여있는 나뭇잎 속으로 몸을 던지며 큰 소리로 웃어대는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큰 행복이었다.


오전 내내 신나게 놀다 지친 아이는 낮잠 잘 시간이 되자 일분도 안 돼 잠이 들었고, 조용해진 집안을 따듯하게 비추는 햇살과 함께 얼그레이 티를 마시며 창 밖의 나무들을 바라보니 삶은 완벽 그 자체였다.


나는 삶이 참 많이 변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백화점에서 새로 산 구두에 어울리는 옷을 탐색하느라 하루의 반 이상을 소모하던 나였다. 그러나 오늘은 아침을 먹자마자 세수도 안 한 채로 남편의 내복을 입고 구멍이 난 털모자를 쓰고 곧 겨울을 맞이하는 옥수수와 토마토 밭의 내년의 결실을 기대하며 열심히 낙엽을 쓸어 담는 아줌마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의 내가 참 좋았다. 그리고 오늘 하루가 좋았다. 일을 하며 노동이 인간에게 주는 가치에 대해 생각했고 모든 것을 내어주는 나무에게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목적지만 있으면 그것이 계획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여행을 떠날 때면 언제나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무작정 가방 하나 들고 떠나곤 했다. 겁이 없었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계획 없이 떠나는 여행은 항상 전혀 예상치 못한, 하지만 완벽한 장소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완벽한 계획은 완벽한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두려움이 없다면 계획이 필요하지 않다. 삶이 나를 보다 더 좋은 목적지에 데려다 줄 거라는 바보 같은 믿음 하나만 있으면 된다. 삶이 하나의 여행이라면, 꼭 그렇게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런던의 비비안 웨스트우드를 꿈꾸던 내가 시카고에 사는 평범한 주부가 되었지만 나는 삶이 나를 비루한 곳에 데려다 놓았다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가장 낡고 오래된 집이지만 마당만큼은 가장 넓다. 남편이 집을 고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사람 사는 공간이 아니라 나무들이 살아갈 공간이었다. 우리 집은 마당에만 여섯 그루의 나무가 있는데 작년에 한 그루의 뿌리가 수도관을 치는 바람에 잘라낼 수밖에 없었고, 남편은 큰 톱으로 나무를 잘라내며 연신 나무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남편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처음에는 이 집이 참 싫었다. 오래되어 낡아진 곳들이 언제나 눈에 보여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정작 나를 괴롭혔던 것은 낡은 집이 아니라 부서진 나의 마음이었다. 제대로 살지 못해 가난한 남자를 만났고 이루어 놓은 게 없어 낡은 집에 살게 되었다며 나의 처지를 비관했었다. 그렇게 슬픈 마음을 쓸어 담으며, 나의 인생을 한탄하며 매일 밤 나뭇잎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를 들으며 명상을 붙잡았다. 그리고 내가 고통을 마주 보고 나의 삶을 안쓰러워하고 나의 내면을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은 다르게 보였다. 계절에 따라 색을 바꾸는 나뭇잎들을 보며, 가녀린 나뭇가지에 바쁘게 둥지를 짓는 새들을 보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내가 어떻게 이런 풍요를 누리게 되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신은 나무에게도 저렇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는데 나에게는 얼마나 더 좋은 것을 주셨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삶은 언제나 나를 완벽한 곳에 데려다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삶을 너무 두려워하지도 미래를 너무 걱정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영감은 생각의 꼬리를 따라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불현듯 내면에 있는 것을 건져 올리는 것이다. 삶 속에는 더 좋은 일들이 많이 숨겨져 있고 수많은 영감들은 당신이 자신을 기억해 주길 기다리고 있다. 느낌을 따라 삶 속에 모든 결정권을 내어주고 살다 보면 완벽한 계획으로 자신을 옭아매지 않아도 된다.


이것이 좋다, 저것이 좋다 판단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세상을 바라보면 그냥 모든 것이 다 좋다. 떨어진 잎도 거름이 된다.






이전 02화 아파서 감사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