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 없는 욕망의 거울

시즌 2

by 남킹


강태식 형사의 귀에 ‘박하진’이라는 이름이 꽂히는 순간, 4월의 나른한 오후 공기는 의미심장한 무게를 띠기 시작했다.

하나의 죽음은 또 다른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얽히고설킨 인연의 실타래는 이제 막 그 흉측한 매듭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태식은 찌그러진 차체 너머로 보이는 압구정의 번화한 거리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저 화려한 쇼윈도와 네온사인 뒤편에서, 또 다른 비극이 조용히 싹트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후배 아나운서의 자살이라는 비극의 파문은 처음에는 최애란을 향해 거세게 몰아쳤다.

그녀의 직설적이고 공개적인 폭언들이 먼저 사람들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후배가 남긴 일기장과 복원된 스마트폰 속 대화들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여론의 물결은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최애란의 갑질이 뜨거운 용암처럼 즉흥적이고 폭발적이었다면, 박하진의 그것은 차가운 얼음 송곳처럼 치밀하고 지능적이었다.

후배의 일기장에는 애란에게 혼나고 위축된 날보다, 하진의 은근한 따돌림과 교묘한 이간질에 영혼이 갉아 먹혔던 날들의 기록이 훨씬 더 많았다.

‘오늘 하진 선배가 내가 PD님께 칭찬받은 것을 보고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쟤는 꼬리 치는 재주 하나는 타고났다’고 비웃었다.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지만, 모두가 그 말을 듣고 나를 경멸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투명인간이 된 것 같았다.’

‘하진 선배는 단체 카톡방에서 나만 쏙 빼고 대화를 나눈다. 업무 지시도 일부러 나를 건너뛰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서 나를 바보로 만든다. 내가 실수를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럴 줄 알았다’며 모두에게 나의 무능함을 광고한다. 차라리 애란 선배처럼 소리라도 질러주면 시원할 텐데, 하진 선배의 침묵은 나를 서서히 죽여간다.’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지는 그녀의 추함 앞에, 대중의 분노는 더욱 들끓었다.

방송국 관계자들이 아무리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주려 해도,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여론의 불길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악마의 편집’보다 더 잔인한 ‘악마의 뒷담화’.

박하진은 그렇게 최애란을 뛰어넘는 ‘국민 밉상’으로 등극했다.

결국, 몇 달 뒤 박하진은 사직서를 쓸 수밖에 없었다. 인사팀장은 그녀의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박하진 씨, 본인을 위해서도, 회사를 위해서도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펜을 들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써 내려갔다. 종이 위를 스치는 펜촉 소리가 그녀의 자존심이 긁히는 소리처럼 들렸다.

회사를 나오는 순간까지 그녀는 꼿꼿하게 허리를 폈다. 하지만 그녀의 등 뒤로 쏟아지는 동료들의 경멸과 안도가 섞인 시선을 느끼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백수가 된 그녀는 강남의 화려한 오피스텔에 스스로를 유폐했다. 그곳은 그녀의 성이자 감옥이었다.

처음 며칠은 억울함과 분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인터넷에 자신의 이름을 검색할 때마다 쏟아지는 악플들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찔러댔다.

‘저런 여자가 아나운서라니, 나라 망신이다.’

‘관상은 과학. 딱 봐도 성격 더럽게 생겼네.’

‘사람 목숨 끊어놓고 넌 발 뻗고 잘 자니?’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분노는 서서히 불안감으로 바뀌어갔다. 그녀는 평소 사치가 엄청나게 심했다.

신상 명품백이 나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렸고, 한 끼 식사에 수십만 원을 쓰는 일도 예사였다.

방송국 아나운서라는 타이틀은 그녀의 허영심을 채워주는 든든한 스폰서였다. 하지만 이제 월급 통장은 텅 비었고, 그녀의 화려한 삶을 지탱해주던 모든 것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는 여왕벌처럼 살았지만, 꿀을 모으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먹고살기 위해 뭔가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한 번 맛본 정상의 달콤함은 그녀의 눈을 멀게 했다. 방송국 아나운서라는 지위를 누렸던 그녀에게, 그 이하의 직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방송국에 원서를 내자니, 그녀의 이름 앞에는 이미 ‘갑질 아나운서’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그녀의 통장 잔고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할 무렵, 그녀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그녀가 가진 유일하고 가장 강력한 무기, 바로 그녀의 ‘외모’를 사용하는 것.

결혼.

그녀의 사치와 허영을 기꺼이 감당해 줄,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는 것.

소위 말하는 ‘퐁퐁남’을 물어 인생 역전을 꾀하는 것이었다. 그것만이 이 잿빛 현실에서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처럼 보였다.

그녀는 수소문 끝에 국내 최고의 결혼정보회사, VVIP들만 가입할 수 있다는 <퍼스트 클래스>의 문을 두드렸다.

상담실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눈부셨다. 값비싼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고, 수년간의 관리로 다져진 완벽한 얼굴과 몸매. 커플 매니저는 그녀의 이력서를 훑어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비록 현재는 무직에 평판이 바닥이었지만, 전직 지상파 아나운서라는 타이틀과 이 정도의 미모라면, VVIP 남성 회원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한 ‘상품’이었다.

"박하진 회원님의 조건이라면, 최고의 남성분들을 소개해드릴 수 있습니다. 원하시는 조건이 있으신가요?"

하진은 턱을 살짝 치켜들며 우아하게 대답했다.

"조건은 단 하나예요. 나이, 외모, 성격… 다 상관없어요. 오로지 돈만 봅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건 도박판에 뛰어들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자신을 구원해 줄 왕자님, 아니, ‘물주님’을 기다렸다.

며칠 지나지 않아 결정사에서 전화가 왔다.

"하진 회원님, 축하드려요! 회원님께 딱 맞는 분을 찾았습니다."

커플 매니저의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했다.

"직업은 변호사시고요, 국내 최고 로펌 파트너이십니다. 나이는 사십 대 초반, 아직 미혼이시고요. 아버님이 전직 장관 출신이라 집안도 아주 빵빵합니다. 사진 보실래요? 인물도 아주 호감형이세요."

하진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변호사, 장관 아들. 완벽했다. 그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인 최고급 한정식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대감에 입가에 미소가 절로 번졌다.

남자는 사진보다 실물이 더 나았다. 고급 맞춤 정장을 입은 모습은 지적이고 세련되어 보였다. 두툼한 안경 너머의 눈빛도 선해 보였다. 첫인상은 합격이었다.

박하진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자신의 매력으로 이 남자를 단숨에 홀릴 계획을 세웠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진 씨. 방송에서 뵐 때보다 훨씬 미인이시네요."

남자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과찬이세요, 변호사님. 저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하진은 가장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화답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값비싼 코스 요리가 하나씩 나올 때마다 남자는 음식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대화를 이끌었다.

하진은 맞장구를 치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 남자라면, 자신의 남은 인생을 맡겨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남자가 수저를 들기 위해 손을 테이블 위로 올리는 순간, 하진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그의 손톱이었다.

그의 열 손가락 모두의 손톱 밑이, 시커멨다. 마치 어제 밭이라도 맨 사람처럼, 손톱과 살 사이의 경계선에 검은 흙 때가 초승달처럼 끼어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하루 이틀 사이에 생긴 때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피부의 일부가 되어버린 듯한, 완고하고 지저분한 검은 선이었다.

순간, 하진의 모든 감각이 정지하는 듯했다.

방금까지 맛있게 느껴졌던 음식의 맛이 느껴지지 않았고, 부드럽게 들리던 남자의 목소리도 웅웅거리는 소음처럼 멀게만 들렸다. 그녀의 모든 신경이 그의 손가락 끝에만 집중되었다.

더러움. 불결함. 지저분함.

그녀는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려 애썼다.

‘아닐 거야, 내가 잘못 본 걸 거야. 아니, 설령 더러우면 어때. 돈이 있는데. 집에 가서 씻으면 그만이지.’ 스스로를 세뇌했지만, 한번 뇌리에 박힌 이미지는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혔다.

저 손으로… 저 더러운 손으로 내 얼굴을 만진다면? 내 몸을 더듬는다면?

상상만으로도 속이 메스꺼워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아무리 돈이 좋고, 남자의 배경이 탐나더라도, 저렇게 더러운 남자와 한 침대에서 살을 부딪히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녀가 평생을 바쳐 가꿔온 결벽에 가까운 완벽주의가, 그의 손톱 밑 검은 때 앞에서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하진 씨? 어디 안 좋으세요? 얼굴이 하얗게 질리셨는데…."

남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 아뇨! 괜찮습니다. 갑자기… 갑자기 속이 좀 안 좋아서…."

결국 그녀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급한 일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레스토랑을 벗어나 차가운 밤공기를 마시는 순간, 안도감과 함께 깊은 절망감이 밀려왔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고작 손톱 때문에….’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고작 손톱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

한 달 뒤, 그녀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의사였다.

"서울대 의대 출신이시고요, 강남에서 개인 병원 운영하고 계세요. 나이는 서른아홉. 이분도 아직 미혼이시고요. 지난번 분보다 더 젊고 좋으시죠?"

박하진은 한껏 꾸미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통장 잔고는 이제 정말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월세가 밀리기 시작했고, 카드사에서는 독촉 전화가 빗발쳤다. 이번에는 정말이지, 웬만하면 붙잡을 생각이었다.

손톱이 더러우면 내가 직접 깎아주면 되고, 발을 안 씻으면 내가 씻겨주면 된다고, 그녀는 수십 번 다짐했다.

남자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깔끔하고 단정했다.

지난번 남자처럼 더럽지 않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말투는 조금 날카로운 면이 있었지만, 의사라는 직업의 특성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는 내내 무언가 신경이 거슬렸다. 균형이 맞지 않는 느낌.

그녀는 그 위화감의 정체를 찾기 위해 남자를 유심히 뜯어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했다.

그의 지나치게 큰 두상.

한마디로, 가분수였다.

어깨는 좁고 체구는 왜소한데, 머리만 비정상적으로 컸다. 마치 만화 캐릭터 같기도 하고, 막대 사탕 같기도 했다.

‘괜찮아. 머리가 좀 크면 어때. 그 머리로 공부해서 의사 된 거잖아. 돈만 잘 벌어오면 되지….’

그녀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그의 농담에 웃어 보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머릿속에는 기괴한 환영이 떠나지를 않았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깼는데 커다란 가분수의 남자가 내 옆에 누워 코를 골고 있다면….

매일 아침마다 그 거대한 머리를 마주하며 절망을 느끼게 될 거라는… 끔찍한 상상.

그 머리가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드는 상상.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아빠를 닮아 가분수로 태어난다면….

그녀의 상상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그녀를 잡아 흔들었다.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시선은 자꾸만 그의 머리 크기에만 고정되었다. 그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음식은 모래알처럼 껄끄러웠다.

결국 그녀는 또다시, 밥을 먹자마자 뛰쳐나오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그녀는 더더욱 깊은 절망에 빠져들었다. 이제 정말이지 돈이 없었다.

월세 보증금마저 까먹기 시작했고, 다음 달에는 당장 길거리로 나앉게 생겼다.

부모님이 계신 시골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깡촌에서 평생 농사만 짓고 살아온 부모님과 그 좁은 동네.

그녀에게는 두 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였다. 게다가 이미 그 동네에서 그녀는 엄청난 출세의 아이콘이었다. 자기 동네에서 처음으로 서울의 지상파 아나운서가 나왔으니, 부모님의 자부심과 자랑은 하늘을 찔렀다.

그런 그녀가 빈털터리가 되어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동네 이장부터 파출소장까지, 온 동네 사람들이 구경하러 올 것이고, 그들의 동정과 혀 차는 소리를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초조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결정사에서 마지막 구원처럼 전화가 걸려왔다.

"하진 회원님! 이번엔 정말이에요! 제가 장담하는데, 이번 분은 회원님 마음에 쏙 드실 겁니다!"

커플 매니저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흥분되어 있었다. 박하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휴대폰을 귀에 바싹 갖다 댔다.

"어떤 분인데요?"

"나이는 마흔다섯이시고요. 돌싱이시긴 한데, 자녀는 엄마랑 같이 미국에 살고 있어서 양육 부담은 전혀 없으세요. 직업은 공학 박사! 대전 항공우주연구원 책임 연구원이십니다. 재산은… 추정 자산만 100억이 넘으세요!"

100억.

그 숫자가 하진의 귓가에 천둥처럼 울렸다.

"사… 사진은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손톱이 더럽거나, 머리가 크지는 않을까.

"사진 바로 보내드릴게요. 한번 보세요. 절대 가분수 아니고요, 아주 훈남이세요. 제가 보장합니다!"

잠시 후, 휴대폰 화면에 남자의 사진이 떴다.

사진 속의 그는 중후하고 지적인 매력을 풍기는, 그야말로 '훈남'이었다. 부드러운 눈매와 오뚝한 콧날, 다부진 턱선.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스타일.

박하진은 사진을 든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됐다!'

그녀는 쾌재를 불렀다.

'돌싱이면 어때… 재산이 100억인데! 게다가 저 뛰어난 머리, 저 탄탄한 직장, 저 호감 가는 얼굴까지!'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부터 그녀는 잠을 설쳤다. 오늘은 그녀 인생의 분수령이 될 날이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두 손을 꼭 모았다.

'이번에는 기필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남자를 잡고야 말겠어.'

그녀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먹잇감을 발견한 굶주린 맹수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그녀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향하는 곳이 구원의 동아줄이 아니라, 더 깊고 어두운 심연으로 향하는 덫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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