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싸우는. 어쩌면, 시작점.
엄마와 싸우기 싫어 서울로 도망친 지 12년.
그 세월 동안 나는 사회에, 세상에, 사람에 지치고 지쳐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엄마 집으로 내려왔다.
트럭 2대나 되는 12년간의 살림짐들, 그리고 고양이 네 마리와 함께.
이삿짐을 싣고 엄마 집으로 가기 전, 엄마가 미리 내 연락을 받고 서울로 부랴부랴 올라왔었다.
나는 어릴 적 엄마와 나와의 사이에 크고 작은 트라우마들과 상처들을 가득 떠 안고 살았는데, 괜찮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오히려 30살이 넘어가니 나도 몰랐던 무의식 속에 꽁꽁 숨겨져 있던 트라우마들이 순식간에 시한폭탄 터지듯, 수면 위로 올라와 펑!하고 터져버렸다. 나도 모르게 말이다.
나의 멘탈은 더욱이 12년간의 온갖 모진 험한 세상일들까지 겪고 나니 크게 데여 버린지라,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온갖 정신질환적인 중증이상의 우울증, 공황장애, 대인기피증, 강박증, 분노조절장애, 경계성장애, 조울증, 극심한 온갖 공포증들까지 다 합치면 셀 수 없을 만큼 나의 정신은 피폐해져 있었다.
그나마 홀로 살면서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게 되면서 그 아이를 내가 보살피는 것이 아닌, 오히려 내가 그 아이 덕분에 버틴 세월이었다.
고양이는 그렇게 어미가 되고, 3번의 출산을 통해 나머지 세 마리의 소중한 아이들을 나의 유일한 가족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런 나에게 고양이를 포기 할 순 없는 이유였다.
이 아이가 나를 살려주었는데, 내가 어떠한 비겁한 이유로 포기할 수 없었다. 이 아이들도 귀하고 소중한 살아있는 생명인데, 한 번 품었으면 이 아이들이 곤히 무지개다리 건널 때 까진 어떻게든 이제는 내가 책임지고 보살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엄마는 미리 서울 집에 올라와 하루를 묵으면서, 옮길 짐 정리들을 도와주고, 고양이들과 마주했다. 당연히 엄마가 받아들이기로 했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싸울일이 없다고 생각했다.(이 내용은 다음편에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사를 하던 날 짐이 너무 많고 엄마 집은 주택 2층짜리 건물이어서, 2층으로 그 많은 짐들을 옮기려면 사다리차가 필요했고, 2층 창문을 통해 짐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엄마가 미리 내가 살던 집을 탐사했지만, 이토록 정작 직접 마주하니, 예상을 뛰어넘게 짐이 많아도 너무 많았던 것이다.
거기에다, 처음 겪어보는 장거리 이사에 고양이 네 마리 식구는 잔뜩 긴장해 눈물을 글썽이며 서럽게 울부짖어댔다.
엄마는 무언가를 하려면 빨리빨리 치우고 청소하고 정리해서 일을 끝마쳐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사 당일 그런 난장판이 되버린 광경을 보니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첫 날 부터 우린 싸웠다.
이사 오기 전, 내 짐이 들어갈 방에 자리들을 정리 정돈하고, 집 안을 청소해놨는데, 이사센터 아저씨들이 잔뜩 신발을 신고, 온갖 먼지들과 짐들을 마구잡이로 밀어넣으니 어안이 벙벙하고 정신이 날라갈 것 같지 않은 가.
나는 엄마 집에 얹혀 살기로 한 입장이라, 처음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미안했다. 엄마가 나로 인해 이런 고생을 하게 되니 당연히 미안했지.
그러나 이내, 엄마는 그 난장판이 되버린 집안 상황을 보니 멘탈이 깨져 그만 나에게 신경질을 내고 말았다.
나는 그런 엄마의 성격을 알기에, 얼른 짐정리를 조금이라도 도와주려 했는데, 엄마는 엄마의 동선이 있고, 엄마의 순서가 있는지라, 내가 그리 왔다갔다 하는 게 더 정신 사나웠을 일이었겠지. 그래서 나한테 그냥 좀 가만히 좀 있으라고 툭 내뱉는 말에 잔뜩 힘이 들어가 신경질로 표출이 되었다.
나는 이론상 머리로는 이해는 하는 편이지만, 나도 사람이기에, 감정이 상할 수 밖에 없었다.
엄마의 입에서 나오는 높아지는 언성. 그 신경질적인 말투에 대해 나는 트라우마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엄마 마음을 알면서도, 나 또한 극도로 순간 스트레스가 폭발해 결국 엄마와 싸우고 만 것이다.
예전의 엄마는 서울 집에 말 없이 올라온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나의 집 안에 엄마의 발 한자국도 들이지도 못하게 하고, 고양이들도 못 보게 하고 매몰차게 집 앞 카페로 끌고 나섰다. 왜 찾아왔냐며. 이렇게 불쑥 찾아오며 어떡하냐며. 온갖 꾹꾹 눌러담은 반찬더미들이 담긴 캐리어를 끌고 3시간 반이나 헤매고 헤매 찾아온 나의 엄마에게. 그렇게 차갑게 대했다.
나는 불행한 일을 어릴 적 많이 겪었다.
처음에도 말했듯이, 나는 잘 이겨내고, 긍정적으로 잘 버티며 바르게 살아오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도 모르는 나의 내면 속의 응어리들이 그렇게 30살이 넘어서야 화산 분출하듯 온갖 분노가 치밀어 올라올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나도 몰랐던 나의 화산 분출 버튼이 어느 날 엄마의 어떤 말로 인해 눌러진 것이다.
엄마와 아빠는 아주 일찍이 내가 어릴 적 이혼하셨다.
그러나 엄마는 아빠에 대한 원망을 주로 나에게 자주 하소연 + 분풀이를 하고는 했다.
서울에서 지내다 큰 맘 먹고 엄마 집에 간만에 엄마가 보고싶어 보러 내려갔다.
어쩌다 보니 엄마의 말에서는 어김 없이 “네 애비 닮아가지고…”라는 늘 노이로제 걸릴만큼 들어왔던 원망과 화풀이를 들었는데, 그 날따라 이상하게도 나는 분노가 아주 심하게 폭발해버렸지 뭔가.
“내가!!! 언제까지 이 소리를 듣고 살아야 해? 잘못은 어른들이 해 놓고 왜 자식한테 언제까지 화풀이 하고 원망할 생각인건데?! 언제까지 날 지옥 속에 살게 만들건데, 어?! 말해봐!! 내가 엄마 살리려고 무슨 짓까지 숨기며 그렇게 살았는데!!! 내가 엄마 감정 쓰레기통이야? 내가 엄마 살리려고 어떻게 이 악물고 애썼는데 어쩜 이렇게 이기적일 수가 있어?!!”
[쿠궁-쾅.]
그랬다. 정말 순식간에 나도 몰랐던 그 동안의 세월동안 아주 깊은 나의 내면 안의 무의식 어딘가에 꽁꽁 감춰 두었던, 아니 썩고 곪고 삭아가고 있는지도 몰랐던 이 분노와 원망이 분출이 되어버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고,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서러움과 극도의 원망, 경멸, 분노, 자멸감으로 목 놓아 울고 말았다.
엄마는 짐작이라도 했는지.
차분히 나를 달래기 시작하며, 나에게 미안하다고 엄마가 죄인이라며 나를 안으며 천천히. 그리고 살며시 아주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무슨일이 있었던거지?“
그렇다.
나는 엄마가 재혼한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한 성폭행 피해자였다.
초등학교 5학년. 겨우 12살.
그 무렵부터 중학교 2학년때 까지 나는 소리없는 몸부림을 치며 그렇게 끝까지 이 사실을 무덤 끝까지 가지고 가겠노라 다짐하고 다짐하며 살았었다.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엄마는 그 때 당시 심각한 멘탈 상태였다. 당장이라도 자살할 사람이었다. 밥도 안 먹고 빈 속에 깡소주만 들이켜던 엄마는 당연히 해골같이 뼈 밖에 안남은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실을 말하면.
엄마가 죽거나 그 가해자가 죽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니 엄마가 죽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이 들었다. 말 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살아야 했어서.
그게 그토록 긴 세월을 지나고 지나, 터져버렸다. 죽을 때 까지 나 혼자 안고 살아가려 했는데.
그렇게 울면서 나는 서울로 올라가버리자, 엄마는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그렇게 서울 집으로 날 찾아 온 것이었다.
엄마는 내 집에서 쫒겨나듯 작은 카페에서 날 진정시킨 뒤, 정식으로 사과했다. 눈물로.
엄마가 그 동안 몰라줘서 미안하다고. 정말 평생 죄인이라며. 나를 향한 화풀이도, 나에게 그런 상처를 남긴 것도, 모든 게 다 본인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며.
나는 그렇게 엄마를 용서했다.
사실 둘 다의 잘못이 아니다.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참 아프다. 그 순간 너무 매몰찼던 내 모습과 엄마의 어쩔 줄 몰라하는 그 얼굴. 미안하다.
용서했다고 생각했다.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그렇게 엄마 집으로 내려 온 날. 다시 엄마와 싸우면서 절실히 느꼈다.
내 트라우마가 과연 잠재워 질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벌써부터 기가 빨리고 지치고 더 포기하고 싶어졌다. 다시 되풀이 될 것만 같은 예감.
어릴 적 가장 괴로워했던 엄마의 신경질적인 소리. 그 데시벨이 날 자꾸만 자극시켰다.
엄마의 그 소리는 나의 발작 버튼이 되었다.
우린 그렇게 힘겨운 이사 첫 날을 맞이했다. 고양이들은 낯선 환경에 벌벌 떨며 울고 있고.
아주 개 아니, 고양이 난.장.판.! 우리 둘도 난.장.판.!
아이고, 머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