잣대, 편견과 고집, 문화차이, 의식
잣대
오랜세월 나는 정의의 사도였다.
분명 제일 첫 목차에서 정의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 전의 내 모습이었다.
나는 나만의 신념이라 착각하며 살았다.
나만의 신념은 확고하다며.
나의 가치관은 곧, 내 인생이고 세계이고, 전부였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에게 수 많은 좋은 단어들과 문장들이 있음에도, 굳이 부정적인 단어와 문장을 선택해서 말하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 타인들을 상대할때 마다 나의 신념을 늘 강요하고는 했다.
충분히 화를 내지 않고, 차분히 조곤조곤, 예쁜말을 선택해 말할 수도 있는데 굳이 그렇게 말을 해야 하냐며 말이다.
그렇게 잣대를 들이대며, 그 상대를 잘못한 죄인마냥 손가락질을 해댔고, 가르쳐댔다.
참으로 교만할 수가 없다.
내가 이 행위를 스스로 잘못했다 깨달은 것은, 역지사지였다.
누군가가 자신의 신념이라 들먹이며 나를 무한히 가르치려 들었을 때, 느껴버렸다.
‘아, 저게 내 모습이구나. 굉장히 오만하며 꼴보기 싫다.’는 것을 말이다.
다르게 말하면 가스라이팅을 어쩌면 무수히 많은 이들에게 내가 행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뒤부터는 최대한 상대가 나에게 불쾌한 행동을 하더라도, 이젠 이렇게 생각한다.
‘저 사람도 아직 미처 깨닫기 전이겠지. 한때의 나 처럼.’
‘저 사람도 저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거야.’
어떠한가.
이것이 곧 타인에 대한 이해고, 이해는 곧 나에게 돌아온다.
내가 이해받고 싶은가?
그럼 타인을 먼저 이해하자.
이해라는 것은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따져 마땅한 것을 머리로 익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아,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 하는구나.’
‘아, 저 사람은 저렇게 말을 하는구나.’
‘아, 이 사람은 저렇게 행동하는구나.’
‘아, 이 사람은 이런 걸 싫어하는구나.’
그냥 다름을 있는 그대로 날 것 그대로 ‘아, 그렇구나’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을 터득하고나면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더는 힘들지 않고, 내 마음이, 멘탈이 힘들지 않을 수 있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더 이상의 잣대는 내려놓자.
그러고 나면 마음이 굉장이 편안해진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된다.
괜한 부정적인 감정 소모 낭비를 줄이는 길이다.
편견과 고집
위에서 얘기했듯이 색안경과 프레임과 같은 맥락이지만 굳이 한 번더 다른 단어로 표현하는 것은, 정말 살아가는 인생길에서 이 부분은 인간관계를 비롯해, 사회생활, 일상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편견은 고집을 낳는다.
젊은 요즘 세대들이 옛날 방식을 고집하는 어르신이나, 상사를 보면 이렇게 말한다.
“아, 틀딱이. 또 저러네”
“아, 꼰대 진짜 말이 안 통하네”
편견의 무서움은 ‘편파적’이라는 점이다.
편파적인 것은, 한 쪽의 의견에만 쏠리는 현상이라 흑과 백의 논리와도 맞닿는다.
그러한 자기의 옛날 방식만을 고집하는 어른들이 불만족스럽고 불쾌하고 짜증나는가?
그러나 우리도 늙는다.
그리고 다시 세대는 돌고 돌아 ‘나도’ 언젠간 똑같은 소릴 듣는다.
싫지 않은가.
편견은 고집을 낳고, 고집은 도돌이표 처럼 손가락질로 돌아온다.
그러니, 아무리 나이드신 분이어도, 의견이 전혀 맞지 않는 상대여도 우리는 모두 존중해주자.
나중에 우리가 똑같은 ‘틀딱이와 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그리고 기억하자. 존중해주는 방식은 의외로 쉽다.
‘그렇구나.’라고 생각하고,
“그렇군요.”라고 대답해주자.
이 마법의 한 마디는, 누군가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태도임과 동시에 공감해주고 있다는 호감적인 이미지로 바뀌게 해주며, 무례하거나 가르치려들기만 하는 오만한 사람에게 저 한 마디로 입을 잠재울 수 있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문화차이
유명한 실험이 있다.
두 종류의 사진이 있다.
A의 사진에는 사람 한 명이 가운데에서 미소짓고 있다.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웃고 있다.
B의 사진에는 사람 한 명이 가운데에서 홀로 활짝 웃고있다.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화가난 표정이다.
동양인과 서양인에게 모두 같은 두 사진을 보여주며 어떤 사람이 더 행복해 보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동양인은 A의 사진에 있는 사람을, 서양인은 B의 사진에 있는 사람을 선택했다.
이 실험에서 얻게 되는 결과는 무엇일까.
동양인은 조직체계이며, 타인중시적인 사회중심의 문화적 가치관을 지닌다. 즉, 이타주의적인 방향에 초점을 둔다는 것.
서양인은 정반대로, 이기주의란 말을 들을 정도로, 개인주의의 문화적 가치관을 지닌다.
어떻게 보면, 동양인들은 그러한 서양인을 욕하기도 한다.
“어쩜 저렇게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일 수가 있나. 너무 냉정하다.”라는 편견과 잣대를 또 들이민다.
서양인은 타인이 대신 나의 인생을 살아주는 것이 아니기에, 다른 사람들에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내가 웃을 수 있고 행복하다면 된다.
나는 이쪽에 한 표를 던지는 사람이다.
동양인들의 조직적인 체계 프로세스는 굉장히 면밀하고 좋은 방식이다. 안정된 조직과 사회구축을 위해서는 필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동얀인들은 걸핏하면 타인들의 시선을 의식한다.
서양인이 고른 사진처럼 남들이 손가락질을 하거나, 화를내고 있으면 눈치를 보며 속은 기뻐도 기쁜티를 낼 수 없고, 기뻐할 수 없다.
왜 그래야 할까.
정말 그 타인들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것이 아니지 않은가.
동양인이냐, 서양인이냐의 기준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모두의 장단점은 존재하겠지만, 이제 우리도 때로는 서양인처럼, 남들이 뭐라하든 나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을 먼저 챙기고 보살피라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내가 행복하려면, 남의 시선에 신경쓰면 행복할 수 없다.
내가 길거리에 서 있는데, 양말에 빵꾸가 났다.
우연히 그걸 보게되는 지나가던 행인은 그것을 보며 순간 비웃을 순 있겠지만, 그래서 뭐?.
자기는 빵꾸안나봤나. 그럴 수도있지.
그리고 그 순간 일 뿐, 그 지나가던 행인은 당신을 기억하겠는가. 얼굴을 알겠는가.
그러니 우리 좀 더, 자신을 먼저 생각해보자.
타인 눈치 그만보자!
우리는 어째서 남을 의식하는가.
위에서 우리는 왜 남을 의식하는지 전반적인 이유를 알았다.
그렇지만, 이 세상은 홀로 태어나고 홀로 돌아가지만.
또 한 편으로는 사람은 혼자서만 살아갈 수 없는 세상임엔 분명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이득을 주고, 거래를 하고 인간관계는 피할 수 없다.
불가피한 현실이다.
그러나, 위에서 처럼 우리는 속고 있다.
사회 생활이라는 명분 때문에, 대체적으로 우리는 사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눈치를 본다.
조직체계이기 때문에. 룰 때문에. 규칙 때문에.
그러나 어디에도 상사에게 의견을 제시하지 말라는 룰은 없는데 왜들 우물쭈물하는가.
사회생활 오래, 그리고 ‘잘’하려면 입을 닫고 참고 인내하는 것이 성공의 길이라고 누가 말했는가.
중소기업이든, 대기업이든, 우리 모두는 인력들이다. 노동인들이다.
그 노동을 댓가로 보수를 받고 회사를 키워나가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언제까지 상사의 말에 입닫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쉬쉬하는가. 왜 참는 가.
비전을 생각해보라.
내가 한 직장에서 최대한 오래 살아남고자 한다면, 그 회사가 비전이 있는가, 없는가를 따져보자.
내가 최대한 오래, 그리고 편하게 머물러야 하는 회사인데 비전이 없다면 말 그대로 나는 지금 헛다리 짚고 헛고생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부당한 대우를 느낀다면 솔직하게 상사에게 의견제시를 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뒤의 결과가 더 부당하다면, 당연히 당신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빠르게 싹을 자르고 도망쳐라.
그런 회사는 당신의 정신을 점점 갉아먹을 뿐, 성장 할 수 없다.
당당하게 의견제시를 하며, 활발히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조율과 협상이 되며 타협점을 찾으려 하는 대표의 회사를 찾길 바란다.
타인에 대한 눈치는 그저, 내가 상대에게 무례하지 않을 정도의 조절하는 행위로 그치면 될 뿐. 사람자체에, 상사라는 이유때문에 벌벌 떠는 듯한 눈치는 보지 말자는 의미이다.
당신은 당당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타인을 의식하지 말자.
누가 뭐라하던, 욕하는 사람이 나쁜사람이고, 잘못한 거고, 당신은 무해하다.
그렇다고 당신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가치는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자존심을 지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