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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린 Oct 13. 2019

Blood and Sand


늦은 밤이면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새워 통화를 했다. 보고 싶은 마음은 서로의 목소리로 달랬다. 오늘은 애정 넘치는 통화 대신, 함께 즐겨 찾던 Bar에 가기로 했다. 간판조차 없는 그곳은 한적한 주택가 골목에 어울리지 않는 진한 향기로 가득한 시가 Bar였다. 시가에는 전혀 관심 없는 우리가 이런 앤틱하고 음치한 분위기의 Bar라니, 그저 위스키 한 잔과 함께 분위기에 취하고 싶은 날 오는 우리만의 아지트였다.


손님 하나 없는 한적한 Bar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텐더는 우리의 모습이 익숙한지, 당연하다는 듯이 눈인사를 하고 위스키 두 잔을 내주었다. 평일 저녁, 그곳은 오로지 우리만을 위한 로맨틱하고 낭만 넘치는 공간이었다.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그들의 추억으로만 범벅이 되었으면 하는 곳이었다.


그는 목이 타들어가는 도수 높은 스카치 위스키를 샷으로 마시는 걸 좋아했다. 마시는 순간 식도를 타고 온 몸에 퍼지는 그 뜨거움이 생생하게 느껴져서 좋다고 했다. 그를 따라 처음 위스키를 마셨던 날이 떠오른다. 각진 얼음이 들어간 온 더 락. 한 입 마시자마자 찡그러지던 내 미간을 톡톡 두드리던 너. 뜨거운 목 넘김 뒤로 진하게 남던 초콜릿향의 묵직함. ‘아 이래서 위스키를 마시는구나 싶었다.’


그는 그녀가 위스키를 마실 때면 턱을 괸 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지켜봤다. ‘어때? 먹을만하지?’ ‘응,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아. 하지만 샷은 아직 무리야.’ 하고 말하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언제나 위스키를 마신 후엔 달콤한 칵테일을 마셨다. 이름은 ‘Blood and Sand’ 진한 위스키 맛 끝에 라즈베리맛이 나는, 오직 이곳에서만 마실 수 있는 직접 만든 수제 칵테일.


"왜 이름이 Blood and Sand에요?"

"어떤 영화를 봤는데, 거기서 주인공들이 불타는 사랑을 해요. 서로 너무 좋아하는데.... 결말이 엄청 슬픈 새드엔딩이었어요. 제목이 기억이 안나네...아무튼 마지막 장면이 두 주인공인 노을 지는 모래사장에서 이별을 하는 장면이었거든요. 근데 불은 모래로 꺼지않아요. 모래가 불을 숨도 못 쉬게 해서  잡아먹는 느낌이랄까. 그 영화 보고 불타던 사랑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 같다 생각했어요. 그 영화 엔딩 장면이 갑자기 떠올라서 러브 앤 샌드라고 할까 했는데 뭔가 더 강렬한 게 좋을 것 같은 거예요. 한참을 고민하다가 생각난 게 빨간 피! 그래서 Blood and Sand라고 지었어요. 핏빛 사랑 이런 느낌? 하하”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슬픈데, 뭔가 있어 보이네요.”

흥미롭게 이야기를 듣던 그녀에게 그가 말했다.

“역시, 의미는 부여하기 나름이야. 그럼 우린, 그 어떤 것에도 꺼지지 않는 사랑이라고  바꾸자. 모래 따위는 두렵지 않다. 아무리 뿌려봐라 내가 꺼지나. Blood Not Sand 어때?”

“Not Sand? 그게 뭐야. 유치해.”


그의 유치한 말장난 속에는 언제나 애정 어린 진심이 담겨 있었다. 우린 늘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런 그의 장난이 좋았고, 눈빛이 좋았다. 진심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럼 작명 기념으로 같이 마셔.’ ‘ 그래, 오늘만 특별히 마셔준다!’ 달달함이 싫어 칵테일을 줄 곧 거절하던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신 칵테일. 오직 그녀를 위해 마신 칵테일. ‘Blood Not snad’ 끄떡없는 사랑.


우리의 대화는 일상적이었지만 그 일상엔 따뜻함과 행복이 묻어났고, 언제나 솜사탕맛이 났다. 오늘은 라즈베리맛 솜사탕. 내일은 레몬맛 솜사탕. 어떤 날은 농도 짙고 끈적한 초코맛 솜사탕. 하지만 솜사탕은 금방 녹았다. 입에 들어가기도 전에, 서로를 차마 품기도 전에, 손에 닿자마자 형체를 잃었다. 36.9℃ 그들의 온도는 솜사탕에겐 치명적인 온도였다. 타올랐다. 식었다. 마음의 거리 유지 실패. 권태로워진 적정 온도.


그리고 우린, 그렇게 이별했다. 시간이 지나면 전부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며 떠나던 그의 무책임함에 그녀는 갈기갈기 찢겼다. 그리고 함께 그를 찔렀다. 떨림으로 가득 채우던 밤은, 날카로운 말들로 변했고, 순식간에 무채색으로 변했다. 흐르는 눈물은 속도를 잃고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으며, 이내 붉은 피로 변했다. 언제나 이별은 갑작스럽고 자연스럽다. 서로의 속도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일방적인 이해를 바랐다. 이별에는 어떤 수식어도 필요하지 않았다. 결국 비극. 결국은 새드엔딩.  


평일 저녁, 그녀는 쓸쓸함이 묻어나는 그곳을 찾았다. 기억이 무뎌지고, 상처가 아물기 전에 스스로에게 시간을 줘야 했다. 그나마 남아있는 마음을 차곡차곡 모아서 추억이라는 큰 상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것이 지난날의 서로를 그나마 어여쁘게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오늘은 처음으로 위스키를 샷으로 마셨다. 얼음의 차가움이 싫었다. 아직은 뜨겁고 싶었다. 외면하고 싶은 지겨운 미련.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술이 쓰다. 뜨겁다. 미치도록 뜨거웠다. 모래사장에 적힌 이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 독한 위스키 한 잔에 기억도 함께 사라지길 바랬다. 한 잔 두 잔, 그녀는 발버둥을 쳤다. 이 뜨거움이 빨리 사라지길. 그리곤 마지막으로 그녀 앞에 놓쳐진  빨간 칵테일 한 잔. Blood and Sand. 핏빛 사랑.


“이건 안 마실래요. 그거 마시면, 정말 순식간에 모래처럼 사라질 것 같아요. 그리고 오늘은, 뭘 마셔도 달콤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아요. 이 칵테일 마저 쓰게 느껴질 것 같아.”


텅 빈자리에 홀로 남겨진 붉은 칵테일 한 잔. 그리고 그 옆에 주인을 잃은 빈 잔. 그녀는 더 이상 위스키를 마시지 않았다.


아직은, 그 쓰디쓴 목 넘김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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