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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심플 Oct 20. 2019

커피 권하는 사회

핸드드립 커피

 팀장님의 하루 일과 중 하나는, 커피를 내려서 팀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나는 그런 팀장님의 일과를 굉장히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첫 번째로 늘 사오던 커피값을 절약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그 커피가 굉장히 맛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회사에 몸 담기 전의 회사에서도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콩을 가는 소리와 커피의 향이 사무실을 가득 채웠을 때, 나는 솔직히 짜증이 났다.


왜 저렇게 시끄러운 걸 사무실 안에서 하는지, 하고. 지금 되돌아보니 그 당시에 한잔 얻어먹지 못해서 생긴 심술이었나 보다.




 팀장님께는 늘 얻어먹는 입장이지만 ‘얼어 죽어도 아이스’ 협회의 회원으로서 얼음을 사 오고 그 얼음을 집기 위한 집게도 구비해 두었다.


그러다 취미를 찾기 시작하면서 커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팀장님을 유심히 관찰해보았다.

팀장님의 일과는 이렇다.
1) 재료들을 들고 회의실로 들어간다
2) 무언가 소리가 들린다
3) 회의실에서 나와서 팀원들에게 나누어 준다


나의 가벼운 관찰을 통해서는 2)와 3) 사이의 과정은 전혀 알 수가 없었는데,

최근 이야기를 하다 나도 커피 만드는 과정에 참가할 수 있었다.


2)와 3)에는 무려 6개의 세부 프로세스가 있었다.







2-1) 콩을 솎아낸다
날 것의 커피콩은 로스팅이라고 하는 태우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떠올리는 커피콩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때 많은 커피콩이 부서지기도 하고, 흠집이 생기기도 하는데 이러한 콩으로 만든 커피는 맛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 때문에 솎아내야 하며, 마찬가지로 좀 작은 커피콩은 아직 완전히 여물지 않은 미숙한 콩이므로 이 역시도 제거한다.




2-2) 콩을 간다
콩이 너무 굵게 갈리면 나중에 물을 부었을 때 물이 머무르지 않고 금방 빠져나오기 때문에 연하고, 세세히 갈리면 오래 머무르기 때문에 맛이 진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이 원하는 커피맛을 위해 핸드밀에는 스위치가 있어서 굵기를 조절할 수 있다.


‘날’에도 종류가 있어서 세라믹이 맛있다고는 하지만, 카페인을 섭취하기 위함이 커피를 마시는 제1의 목적이므로 어떤 날이든 개의치 않는다.


 콩을 가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지만 흔히 드라마나 광고에서 보는 ‘드르륵드르륵’ 소리를 부드럽게 내기 위해서는 꽤나 팔 힘이 좋아야 한다.





2-3) 필터를 깔고 갈린 원두를 넣는다
핸드드립 커피의 정성은 기성품인 필터조차도 그대로 넣을 수 없게 되어있다.

옆쪽과 아래쪽을 서로 반대방향으로 접어주는 것이라고 한다. 원두를 넣는 것도 아무렇게나 넣으면 안 되고 넣은 뒤 반드시 평평하게 해주는 과정이 필요했다.




2-4) 물을 붓는다.
모든 커피가루를 머금을 만큼 넣어주면 커피가루가 빵처럼 부풀어 오른다.
2-5) 물을 붓는다.
2-6) 물을 붓는다.



이 과정이 끝나면 3~4잔 분량의 커피가 나온다. 바로 마시기에는 약간 진한 감이 있으므로,

여기에 물을 좀 채워서 커피프렌즈라 할 수 있는 우리 팀과 옆 팀에 조금씩 나눠준다.


핸드드립은 맛이 부드럽고, 에스프레소보다 속이 덜 쓰리기에 아침에 먹어도 큰 부담이 없다.




이렇게 매일을 마시다 보면 단점들도 있다.


첫째, 다른 커피들이 맛이 없게 느껴진다(이건 커피프렌즈의 다수가 인정한 부분이다).


두 번째로는 나의 하루가 커피를 마시기 전과 후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 일정을 짤 때에도 커피를 마시기 전의 나는 단순하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이나 계획 세우기 등의 업무를 하고, 마시고 난 다음에 머리를 쓰는 일을 배치한다.





향긋한 커피를 마시며 내가 언제부터 커피를 마시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았다.


예전 캐나다에 갔을 때 길거리에서 S커피전문점의 원두 샘플 받은 적이 있다.


집에 와서 이를 열어보니 커피 가루였고, 당연하게 이를 뜨거운 물에 그대로 담았다.


잘 녹지 않는 커피를 휘저으며 한 모금 마시니 가루가 그대로 입 안에 들어왔다.


그제야 그게 다른 방식으로 먹는 것임을 알았을 만큼 나는 커피에 대해 유식하지 않았다.


이렇게 무지했던 내가 언제부터 커피를 달고 살게 된 것일까? 아메리카노를 마신 것은 4학년~대학원 입학 후이고, 커피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게 된 것은 입사 후이다.




우리는 ‘커피 권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시애틀, 밴쿠버, 런던처럼 세계에서 비가 많이 오는 도시에는 사람들이 실내에 있기 위해 카페가 많다고 한다.


비가 자주 오는 것도, 우기가 있는 것도 아닌 우리나라에 카페가 많은 이유는 아마 커피 없이는 현실의 ‘과로사회’에서 버티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를 지키고 여유를 즐길 수 있을까? 나는 얼마나 더 일을 해야 할까? 앞으로 30년은 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면 갑갑해지고는 한다.


또한 우리는 출퇴근이나 점심시간들을 포함하면 하루에 적어도 10시간은 회사에 매여있다.


최근 우리 회사에서는 주 52시간에 대한 시스템을 도입했는데, 금요일 제외하고 야근으로만 충당한다고 하면 매일 10시까지는 회사에 있어야 한다. 갑갑하기 짝이 없는데, 이 52시간마저도 적다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고 그 긴 시간들을 커피 없이 오롯이 버티기는 힘들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핸드드립 커피에는 여유가 있다.


향을 코로 한 번, 콩을 고르며 촉각으로 한 번, 콩을 갈면서 귀로 한 번, 마시면서 눈과 입으로 한 번 느끼게 되는 핸드드립 커피.


  한 잔을 마시면 혈관에 카페인이 흡수되면서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을 느낄 수 있는데, 언젠가는 그 느낌 없이도 일을 할 수 있기를 내심 바라본다.



핸드드립 커피

가격: 도구 7만원 이상+원두 1만원 이상

(주전자 등 있으면 더 낮아짐)
난이도: ★★
접근성: ★★★★
지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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