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군자들에 대하여 2>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덕이라고 이미 말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도덕군자라고 불리는 자들은 덕의 대상을 자신이 아닌 외부의 신으로 지목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어떻게 비판할까요?
아, 도덕군자들이여, "내가 아닌 것, 그것, 바로 그것이 내게는 신이요 덕!"이라는 저들의 부르짖음 또한 너희의 귀를 파고들었으리라.
덕의 주체가 '나 자신'이라는 차라투스트라의 주장은 매우 깊이 있는 통찰입니다. 우리는 관습과 문화로 이루어진 선과 악의 기준을 학습하며 성장합니다. 따라서 옳고 그름의 기준을 외부에 두고, 그것을 내재화하는 것을 교육의 일환으로 삼아왔습니다. 따라서 자신에 대한 타인의 평가가 좋으면 갖은 칭찬을 통해 스스로가 선하다는 인식을 하게 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도덕관을 '노예의 도덕'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외부의 악을 상정함으로써 스스로의 선을 확인합니다. 따라서 외부의 대상에 대한 '원한의 감정(Ressentiment)'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는 억압과 권력을 가진 강자에 대한 질투의 감정에 의해서 생겨난 자기 연민의 일종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자들은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한 줌의 정의에 긍지를 느끼며, 그 때문에 모든 것에 못된 짓을 해댄다. 그리하여 이 세계는 저들이 저지르는 불의의 늪에 빠져 목숨을 잃게 된다.... 저들이 나는 정의롭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듣노라면, 그것은 언제나 "나는 앙갚음을 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노예의 도덕을 가진 일부의 사람들이 불합리에 대항하여 잠시의 승리를 쟁취할 때, 그들은 자신들이 정의를 행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러한 불합리가 발생한 근원적인 문제점, 즉 구조적 원인은 해결하지 못하고 이전까지 그 불합리에 의해 이익을 얻던 이들을 정죄하는 일에만 몰두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흔히 목격합니다. 소위 분노와 혐오에 기댄 정치적 구호는 저울을 수평으로 맞추는 '정의'를 실현하기보다, 반대편의 저울에 손을 얹어 상대방에게 앙갚음을 하는데 몰두하게 됩니다.
벗들이여, 나 오히려 너희로 하여금 저들 바보들과 거짓말쟁이들로부터 배운 저 고리타분한 언설에 싫증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온 것이다.... "사심이 없을 때, 행위는 선하다."라고 말하는 일에 싫증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진정으로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심 없음'을 내보이는 것은 수많은 부작용을 낳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내면은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의 마음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공허합니다. 또한 결과적으로 해악이 발생하더라도 사심이 없었음을 호소하는 상황이 빈번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이익으로부터 멀어지기 어렵습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자신의 이익보다 공공의 이익을 우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사심을 인정하고, 그것이 공공의 이익에 기여할 때에 그 행위를 선하다고 평가하는 아담 스미스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심 없음'을 기준으로 내세우는 순간, 우리는 조금의 실수로 인해 자책하거나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 자체를 상실하는 많은 예를 보게 됩니다.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평가하는 냉정한 기준에서는 조금의 얼굴도 '흑'으로 평가되고 맙니다. 약간의 때 묻은 양심이 반성과 회개를 통해 다시 용기를 내어 양심을 지킬 수 있도록 돕는 것은 공공의 선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파도가 새로운 놀잇감들을 갖다 주리라. 저들 앞에 새롭고 알록달록한 조개들을 흩어주리라! 그렇게 되면 저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벗들이여, 저들처럼 너희 또한 너희의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거기에다 새롭고 알록달록한 조개들을!
차라투스트라는 선악을 가르는 분명한 기준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준을 선물해주려 합니다. 그 선물은 혼돈을 뜻하는 바다가 파도에 실어 보내준 것입니다. 카오스는 파괴와 동시에 생성이 일어나는 장소입니다. 낡은 기준을 부수고 새로운 기준을 만드는 것은 엄숙함이 지배하는 원칙에 의해서가 아닌, 늘 새로운 시도를 이어가는 놀이와 같아야 합니다. 완벽한 기준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머나먼 여정이기에 놀이와 같이 즐겁고 가벼워야 합니다. 그때 주어지는 알록달록한 조개 속에서 언젠가 반짝이는 진주가 드러날지 모르는 일입니다.
로마 신화에서 미의 여신 비너스(Venus)는 그리스 신화의 아프로디테(Aphrodite)에 해당합니다. 아프로디테는 바다의 '거품(aphros)'에서 태어난 자를 뜻합니다. 혼돈을 뜻하는 바다에 크로노스의 피와 정액이 떨어져 거품이 일며 비너스는 탄생했습니다. 파괴와 동시에 생성이 일어나는 장소인 카오스에서 조개가 떠올라 그 속에서 아름다움이 피어난 것은 엄숙함이나 앙갚음의 무거운 감정이 아닌 흩날리는 꽃잎과 같이 가벼운 놀이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완전한 미를 상징하는 여신의 탄생은 사심이 없는 무욕의 잔잔함이 아닌, 지극히 본능적이고 뜨거운 생명력이 끓어오르는 요동치는 바다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자신의 신체를 가리는 듯한 그녀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자신을 감싸 안는 듯한 자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즉 사심은 진주 속에서 아름다움을 피워낼 수 있는 자기 긍정의 에너지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세상은 꽃이 흩날리고 녹음이 드리우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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