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사라졌다.
[1971년 4월 진해]
해마다 이맘때면 진해는 벚꽃의 만개와 군항제로 들썩이곤 했다. 일제 치하의 슬픈 잔재로 남은 벚꽃나무 가로수들. 분홍빛깔, 흰빛깔로 거리거리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들의 아름다움은 언제 그곳에 뼈아픈 시간이 지나갔는지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그저 바라보다가 넋을 잃기 때문이다.
집 주변에 있는 양어장도 이미 꽃들이 한창이라 진해 토박이들 뿐 아니라 부산, 마산, 창원, 거제 등 비교적 가까운 외지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서울 등 먼 곳에서 방문한 사람들도 이 시기에는 쉽게 마주칠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외지인들이 너무 많아져 불편하다고 투덜댔지만, 나는 진해가 이렇게 이쁘게 변신해 많은 외지인들을 유혹하는 것이 너무도 흥분되고 즐겁게 느껴졌다.
때르릉 때르릉 때르르릉 ~~~
마루에 있는 검은색 전화기가 요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 여보세요? "
다른 사람이 받기 전에 내가 얼른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 아, 네~~~ 저기 고애련 씨 댁입니까? "
똑 부러지는 발음에 나지막한 목소리의 남자였다. 순간 필이 왔다.
" 네~~ 제가 애련인데요. 누구세요? "
대충 누군지 감이 왔지만 모르는 척 누구인지 물었다.
" 아! 애련씨! 잘 지내셨습니까? 저 이 태 은 입니다.
일전에 기차에서 만났던! "
그가 나인 것을 확인하자 목소리를 한 톤 올려 기쁘게 자기가 누구인지 밝혔다.
"아~~~ 아즈씨!! 월남에서 돌아온 새카만 이대위~~ 아즈씨!! ㅎㅎㅎ "
(당시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라는 노래가 유행했었다.)
기차에서 봤던 해군 대위 아저씨였다. 처음엔 모른 척했지만 이제 누군지 신원이 밝혀졌고, 지난번엔 기차 식당칸에서 정말 세상천지 맛나는 돈가쓰와 사이다까지 얻어먹었기에 반갑게 이야기했다.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 김추자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이제서 돌와왔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너무나 기다렸네
굳게 닫힌 그 입술 무거운 그 철모 웃으며 돌아왔네
어린 동생 반기며
그품에 안겼네 모두다 안겼네
말썽 많은 김 총각 모두 말을 했지만
의젓하게 훈장 달고 돌아온 김상사
동네 사람 모여서 얼굴을 보려고
모두 다 기웃기웃
우리 아들 왔다고 춤추는 어머니 온 동네 잔치하네
폼을 내는 김상사 돌아온 김상사 내 맘에 들었어요
믿음직한 김상사 돌아온 김상사
내 맘에 들었어요
" 저기 이번 주 일요일에 시간 되시면 우리 탑산에 놀러 갔다가 백장미 제과에서 맛있는 빵 먹을까요? "
이태은 대위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해왔다. " 저... 그리고 혹시 수련씨도 시간 괜찮으신지 좀 물어봐 주시겠습니까? " 그럼 그렇지. 언니 얘기 왜 안 하나 했다.
" 언니예? 언니한테 물어 보께예. 아직 언니 퇴근 안 했는데 좀 있다 오면 물어보고 연락 드리께예. 근데 아즈씨! 언니 있지예. 실은 만나는 사람이 있으예. " 지난번 기차에서는 먹는 데 정신이 팔린 데다 그와 하도 신나게 떠드는 바람에 정작 언니 얘기는 많이 못했다. 그는 신사였다. 비록 내가 아니라 언니한테 관심이 있어서 접근했지만 선머슴 같은 내게도 무척 친절하고 깍듯이 대해 주었고 대화를 하는 중에도 나의 이야기에 집중해 주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 아... "
그의 입에서 작지만 탄식과도 같은 소리가 살며시 새어 나왔다.
" 아, 그렇구나. 괜찮습니다. 뭐. 그냥 애련씨하고 수련씨하고 같이 주말에 탑산 벚꽃놀이 놀러 가고 제과점 가서 맛있는 거 먹고 그렇게 좋은 시간 보내고 싶어서 연락드린 겁니다. 수련씨한테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된다고 전해 주세요. ㅎㅎㅎ " 그가 짧은 찰나, 실망한 모습을 수습하고 다시 시도를 하고 있었다.
" 마, 그라입시다. 솔직히 골키파 있다고 골 안 드갑니까? ㅎㅎㅎ 아즈씨한테만 말하는 건데 언니 지금 만나는 사람, 사람은 참 좋은데 재미가 윽수로 엄따 아임니까? 사람이 그리 재미 엄써갖고 언니는 만다고 그런 남자를 만나는지 모르겠어예. ㅎㅎㅎ " 그에게 팁을 주었다. 그리고 덤으로 기회를 준 것이다.
[1971년 5월]
" 애련아~~~~ 애련아~~~~ 느거 언니 어디 갔노? 와, 저녁 8시가 됐는데 퇴근을 안 하노? "
드디어 아버지까지 언니의 행방을 묻기 시작했다. 실은 아까 늦은 오후에 회사에서 연락이 왔었다. 수련 언니가 오후 2시경에 회사에서 은행으로 나간 이후로 복귀를 안 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때가 오후 5시경이었는데 전화를 걸어온 남자는 언니 회사의 경리 과장으로 일하는 언니의 상사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실려 있었다. 이유가 아주 큰 이유가 있었다. 언니가 은행에 간 것은 그 달의 직원 급여를 현금으로 찾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제 시간이 지나도 회사에 복귀를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리 과장은 곧 은행에 연락했고 언니가 이미 급여 전액을 현금으로 인출해서 은행을 떠났음을 확인했다.
(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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