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2
나의 전공의 시절을 돌이켜 본다. 전공의 시절은 보고 느끼는 게 많고 여러 감정의 격동을 겪는 시기이다. 그 시절 성실히 써왔던 글로 세상에 나온 책이 제법 많은 것으로 안다. 신경외과 전공의가 쓴 <병원의 사생활>, 비뇨기과 전공의가 쓴 <전공의 일기>, 내과 전공의가 쓴 <가슴 뛰는 삶>, 그리고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시절을 담은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이 우선 생각난다. 전공의 감성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당시에 넘치는 화를 글로 승화했다면 난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까. <전공의 시절 나는 쌈닭이었나>를 쓰면서 싸질러 놓은 글들을 찾다 보니 당시 일화들도 몇 개 나와서 소개해 본다.
일 년 차가 도망을 갔다.
심혈관 조영술을 하던 중 이상해진 할머니 때문에 순환기내과 교수님이 내게 직접 전화를 하신다.(당직도 아닌데!) 급한 김에 가서 봤더니 이거 풍 맞았네. 부랴부랴 MRI실로 모시고는 뇌졸중 집중치료실로 옮기고 혈전용해제를 쓴다. 어큐트(증상 발생 3시간 이내의 뇌졸중 환자)는 손이 많이 가지만 내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었거니 하면서 할머니가 좋아지길 기다린다. 근데 이게 웬걸, 피를 토한다. 기관 삽관을 했다. 객혈을 한다. 오랜 피딱지도 나온다. 어째 어째 숨 쉴 수 있게 해 주고는 동공을 딱 봤더니 비대칭이네. CT실로 데리고 갔다. 연수 뇌출혈이 생겼네. 하아, 이대로 돌아가시겠구나 하는데 응급실 어큐트가 납셨다. 대풍이다, 시술해야 한다. 시간은 새벽 세시. 날밤 새는 거지. 좋아지길 기대하면서 시술을 했다. 그러는 사이 찍어 둔 관류 이미지가 완성됐다. 제대로 우측 중뇌동맥이 전부 다 이미 대풍 맞은 상태네? 희망이 푸슈슉 꺼진다. 몸도 안 좋다. 일 년 차 땐 내 몸이 내 몸이 아님을 알고 아프지도 못했는데 기침도 계속 나오고 목소리도 남자다. 날밤 새어가며 시술하는 중에 응급실 전화가 또 온다. 새벽 네시였나, 대풍이 또 왔다. 말 안 하고 눈 돌아간 우측 편마비란다. 좌측 중뇌동맥 대풍인 거지. 시간은 좀 넘기고 와서 시술은 못하고 보는데 뇌출혈이 동반됐네. 약도 못 쓴다, 수 없다. 아침이 되었다. 온갖 허탈감에 사무쳐하며 십 분만 자야지 하고 눕는데 응급실 전화가 또 온다. 어지러운 젊은 여자다. 때릴 뻔했다. 꼬박 날밤 샜는데 내게 남은 건 뇌 탈출된 아저씨와 뇌출혈 합병증 생긴 할머니와 말 못 하고 눈 돌아간 채 우측 수족은 못쓰는데 치료도 불가한 할머니와 어지럽다고 누워있는 젊은 여자뿐이다. 한 명이라도 경과가 좋았다면 이렇게까지 힘들고 피곤하진 않았을 텐데. 힘든 하루였다. 그래도 난 도망 안 갔는데. 끝없이 기침을 하며 생각했다. 나머지 하나도 도망가면 어쩌지. 하루 만에 삼 년은 늙어버린 것만 같다.
화가 나는데 어디에 화가 나는지
몰라서 화를 낼 곳이 마땅치 않다. 괴사성 근막염이라 하여 정형외과 수술했더니 나오는 것은 정작 똥이고, 그리하여 일반외과 의뢰했더니 복강이 아닌 후 복강이라며 나 몰라라 하고, 앞전에 수술했던 비뇨기과는 자기네 문제가 아니라며 잘해 보세요 하고, 니밀락 내밀락. 환자는 사공이 많아 산으로 가고 피는 계속 나서 혈색소며 헤모글로빈이 반토막인데 아무도 자기네 문제가 아니라 한다. 중간에 끼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 이 과 저 과에 치이며 욕만 먹고 오해 사고 바보가 되어 가는 가운데 환자는 안 좋아지고 있고, 감염내과에서 쓰자 하는 항생제로 버티며 발만 동동 굴리고 있다. 전혀 수술과 무관한 내가 마취과며 일반외과며 정형외과며 타과 전공의에게 이 소리 저 소리 들어가며 자존심 다 구기고 부탁하고 의뢰하고 보호자한테 설명하고 설명하고 설득하고 또 설득하고. 내가 지금 뭐하나 싶다. 다리에서 피가 질질 나는 마당에 뇌경색에 해줄 수 있는 게 단 하나도 없으니 이건 뭔가요. 난 아직도 사망 선언이 너무너무 싫단 말이다. 힘든 직업을 택했다고 약간 후회스러운 요즘.
생각해 보면 나도
이것저것 하는 거 많고 좋아하는 거 많고 즐기는 게 많던 아이였는데, 지금은 열정도 경제력도 부족한 하루하루 피곤한 한낱 레지던트가 되었네. 그저 넋 놓고 쉬거나 자거나 드라마 보거나 시답잖은 게임이나 하면서 머리 식히는. 아등바등 이 시기가 지나고 나면 넌 어떤 삶을 살고 싶은 게냐.
코드블루 CPR,
(입원 환자 심폐소생술 원내 경보), 혈관조영실 환자는 계속 혈압이 쳐진다. 할아버지의 혈관은 어쩌다 그 지경이 된 것일까. 팔로 가는 혈관은 이미 막혀 예쁘게 동그랗게 배꼽 같이 생겼고, 양측 경동맥은 내일이라도 당장 막혀버릴 것만 같고, 간당간당하던 경동맥 하나 열어줬더니 혈압이 47까지 쳐지질 않나. 환자는 어찌나 말이 많고 통증에 예민한지 계속 징징거리고 죽겠다 죽겠다 하길래 그걸로는 안 죽는다 안 죽는다 소리쳤는데(게다가 귀도 안 좋으시다) 진짜 혈압 쳐져 죽을 뻔했네. 오래간만에 발에 땀나도록 뛰었다. 살아나서 투덜대 주는 게 고마울 뻔했다는. 시술하신 교수님이 일 년 반 만에 내게 버럭 하면서 등을 강타하셨다. "니 도파(승압제) 왜 뗐노!" 아이고 환자도 나도 죽을 뻔.
스스로와 격렬히 싸우던 시절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막막하고 끝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을 겪을지 모른다. 끝까지 투덜댔지만, 한 번도 도망가지 않았고, 끝까지 회의했지만, 결국엔 전문의가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언제 그만둘지를 고민하고 있는 나는 과연 직업적 소명의식이 있는 사람인가 없는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