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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남 Aug 24. 2021

6. 굶어 죽은 천재를 아시나요?

독보적인 천문학자_김영

김영(1749-1817)에 대한 이야기는 홍길주의 <김영전金泳傳>과 서호수의 아들 서유본이 쓴 <김인의영가전金引儀泳家傳>을 보면 자세히 나와 있다. 또 그런 내용을 소상히 밝혀서 김영에 대한 나의 이해를 도와준 분이 한양대 정민 교수다. (제목 벤치마킹함)


김영은 산술(算術)에 타고난 재주가 있어 스승도 없이 혼자 공부했다. 처음에는 산가지를 늘어놓고 계산하다가 <기하원본>을 구해 읽은 뒤 그 이치를 모두 터득했다. 김영의 재능을 맨 처음 알아본 사람은 당대에 산학으로 이름이 높았던 서호수였다. 그는 소문을 듣고 김영을 불러 몇 마디 나누어본 후 자신의 실력이 그에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관상감 책임자 홍락성(홍길주의 조부)에게 김영을 추천한다. 김영은 그러한 인연으로 뒷날 홍길주의 스승이 된다. 


김영이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은 1789년, 사도세자의 현릉원을 수원 화산으로 이장할 때였다.  길일을 잡고 시각을 정하는 데에 문제가 생겼다. 해 뜰 무렵이나 해 질 무렵 정남쪽에 보이는 별인 중성(中星)의 위치를 측정한 지 50년이 지나서 별자리의 위치가 1도 가까이 어긋나 있었고, 해시계와 물시계의 시간도 실제와 차이가 났다.  결국 김영으로 하여금 새로 적도경위의와 지평일구(보물 제840호)를 만들게 하고 그것으로 중성을 관측하여 올바른 시간을 추산해야 했다.(<조선왕조실록> 정조 13년 8월 21일자)      


김영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역관(曆官)에 발탁된다. 그동안 전문직인 관상감에 과거시험을 통하지 않고 발탁된 전례가 없었는데 정조 임금이 “김영과 같이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상례에 따를 수 없다”고 하며 특명으로 벼슬을 내린 것이다. 이후 그는 나라에 성력(星曆)과 관련된 논의, 즉 일식이 있거나 혜성이 나타나면 관상감에 불려가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그런데 정조가 승하하고 후원자였던 서호수마저 세상을 뜨자 김영은 벼슬에서 쫓겨나고 만다. 


1807년과 1811년 혜성이 나타나자 나라에서 관상감에 명하여 혜성의 운행도수를 계산해 올리라 했는데 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김영을 다시 불러들인다. 계산이 끝나자 그는 다시 쫓겨났는데, 그의 전기를 쓴 서유본이 당시 일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가 관상감에 들어간 뒤 일이 있을 때는 인정받아 중히 여김을 받았고, 일이 끝나면 그 능력을 질투하여 왁자하게 떼거리로 일어나 그를 괴롭혔다. 면전에다 욕을 하고 주먹으로 때리기까지 했다.     


김영의 제자 홍길주는 일고여덟 살에 기하학을 배워 뺄셈과 나눗셈만으로 제곱근을 구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이 밖에도 부정방정식이나 황금분할, 원에 내접하는 다각형의 성질, 세 정수로 이뤄진 직각삼각형의 조합 등 여러 수학 분야에 대한 독창적인 풀이법을 발견했다. 는 황도와 백도 상 해와 달의 운행을 예측한  <호각연례>를 완성한 후 자신의 수학 선생인 김영을 찾았으나 선생이 세상을 뜨는 바람에 보여줄 수 없었다.  


수학에서 출발한 김영의 관심은 천문과 역법, 주역과 악률 그리고 서구의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확산되었다. 그러나 이를 기록하고 미처 탈고하지 못한 원고 상자를 관상감 생도가 훔쳐갔다. 가난을 떨치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는 말이 있다. (참고로 사자자리 유성우의 최초 관측 보고는 1799년 11월 미국에서 있었다.)


홍길주가 말한 것처럼, 세상은 재주 있는 자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김영의 삶을 돌아보는 동안, 인도 빈민가 출신의 천재수학자 라마누잔에 관한 영화 <무한대를 본 남자> 이미지가 오버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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