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도망시悼亡詩 (1) 죽은 아내를 애도하며
그대 곱던 모습 어렴풋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깨어나 보니 등불만 외로이 타고 있네.
가을비가 잠 깨울 줄 진작 알았더라면/ 창 앞에 오동일랑 심지 않았을 것을.
송곡 이서우 (1633-89)가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하고 쓴 시 ‘도망悼亡’이다. (도망悼亡: 죽은 아내나 자식 혹은 친구를 생각하여 슬퍼함) 꿈결에 아내 얼굴이 흐릿하게 보이기에 똑바로 보려고 눈을 떴는데 등잔불만 저 혼자 깜박이고 있다. 홀로 남은 자신이 외로운 것이다. 창밖에는 오동잎 위에 떨어지는 가을비 소리가 요란하다. 빗소리가 아니었다면 아내의 얼굴을 더 볼 수 있었을 텐데. 애꿎게도 창 앞에 잎 넓은 오동나무 심은 것을 후회하고 있다. 아내를 잃고서 빈방에 혼자 누워 있는 이의 외로움이 오롯이 느껴진다.
심노숭(1762~1837)의 아내는 젊은 나이 31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네 살 된 막내딸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이 더욱 악화되어 죽은 것이지만, 심노숭은 전적으로 자신의 무능함과 가난 탓이라고 여겼다. 아내가 시래기국조차 배불리 먹지 못했고, 병이 나도 좋은 약재를 쓸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식구들이 자신의 병수발과 초상을 치르느라 고생할까 봐 아내는 미리 친정에 가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심노숭은 아내가 죽은 뒤 몹시 슬퍼하며 매일같이 눈물을 흘렸다. 오죽하면 그는 도대체 눈물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그 근원을 파헤쳐보고자 했다.
눈물은 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에 있는 것인가? 눈에 있다고 하면 마치 물이 웅덩이에 고여 있는 듯한 것인가? 마음에 있다면 마치 피가 맥을 타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것인가? 눈물이 나오는 것은 다른 신체 부위와는 무관하게 오직 눈만이 주관하니 눈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음이 움직임 없이 눈 그 자체로 눈물이 나오는 일은 없으니 마음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음은 아래에 있고 눈은 위에 있는데 어찌 물인데도 아래로부터 위로 가는 이치가 있단 말인가!
심노숭은 진실한 감정으로 눈물을 흘리는 순간 아내의 넋이 자기 곁에 와 있는 것이라고 하며, 2년여 동안 애도하는 시 26편, 문 23편의 글을 썼다.
또한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 간 지 3년째 되는 해, 1842년 11월 아내 예안 이씨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내의 지병을 걱정하던 추사는 한 달 뒤에야 부음을 들었다.
지금 부인의 상을 당해서는 놀라고 울렁거리고 얼이 빠지고 혼이 달아나서 아무리 마음을 붙들어 매려 해도 길이 없으니 이는 어인 까닭인지요...... 부인이 먼저 죽고 말았으니 먼저 죽어가는 것이 무엇이 유쾌하고 만족스러워서 나로 하여금 두 눈만 뻔히 뜨고 홀로 살게 한단 말이오.
추사가 쓴 통곡의 제문 일부다. 그의 도망시 또한 절창이다.
월하노인 시켜 저승에 하소연해/ 내세에는 우리 부부 처지 바꿔 태어나리.
나는 죽고 그대만이 천 리 밖에 살아남아/ 그대에게 나의 이 슬픔 알게 하리.
절해고도 그 먼 제주도까지 김치를 만들어 보내주던 아내였다. 정작 아내의 죽음 앞에 가서 곡 한 번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월하노인에게 하소연하겠다는 말로 말문을 열어 내세에 다시 부부로 만나게 해달라고 조르겠다고 했다. 그때 내가 먼저 죽고 당신은 살아남아 지금의 내 아픈 마음을 알게 하겠다는 것이다.
엊그제 문학평론가 이어령 선생이 지구별을 떠나셨다. 한국 지성사에서 한 세기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이화여대에 오랫동안 몸담으신 스승이기에 허전한 마음이 크다. 그가 남긴 말씀을 되새겨본다. “애초에 있던 그 자리로, 나는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