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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yeong Oct 10. 2023

가끔은 천천히 걸어볼까

매일 쓰는 편지

그곳 날씨는 어때? 이제 10월 중순에 접어드는 한국의 가을은 외투가 필요한 계절이 됐어. 몸이 추워지니 마음도 덩달아 추워지는 것 같아. 여름에 휴가를 못 가서 추석 연휴 뒤에 3일 붙여 기나긴 시간 동안 쉬었어. 그런데도 회사에 복귀하고 나니 다시 휴가가 그리워지네. 휴가를 가기 위해 일한다는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나 봐.



쉬는 동안 저녁을 먹고 선선한 바람 맞으며 밤 산책을 다녔어. 혈당 관리 때문도 있지만 난 걷는 걸 무척 좋아하거든. 걸어서 20분 거리의 카페에 가 디카페인 커피도 마시고 서울의 저녁 풍경도 살펴보았지. 숲길이나 자연 속을 걷지 못해 아쉽지만 도심의 밤을 걷는 것은 나름 흥미로운 일이었어. 퇴근 중인 아이들과 직장인, 손잡고 웃으며 걷는 연인, 뭐가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던 아저씨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본 건 내겐 큰 수확이었거든. 일이나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으니 주변 풍경도 잘 보이더라고. 사람과 가게들을 지나치면서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했어. 대개는 다 사라지고 말겠지만 뭐 어때. 그중 하나라도 살아남아 내 이야기에 안착할 수 있다면! 내 산책은 꽤 성공적인 일이잖아.



넌 어떻게 걷는 편이니? 느리게? 빠르게? 난 어릴 때는 빠르게 걸었던 것 같아. 마치 경보하듯, 경쟁하듯 걸었던 것 같아. 누군가를 앞지르면 짜릿한 성취감도 있었지. 과거의 한 회사에서 누군가는 그렇게 말하더라. 자신이 출퇴근길에서 빠르게 걷는 이유는 그 시간이 너무 아깝기 때문이라고. 회사에 가서 일을 하든, 집에 가서 쉬든 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너무 아깝다는 거야. 넌 어때? 걷는 일이 아깝니? 어찌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나도 예전에는 그런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 주변의 풍경이나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것은 그저 사치라고 여겼어.



요즘 들어 내 걸음은 많이 느려졌어. 요 몇 년 새 그걸 확실히 느껴. 지하철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 길이면 내 앞을 몇 명이 앞지르는지 모르겠더군. 몸이 무거워진 건지, 아니면 마음이 바뀐 건지. 둘 다일 수도 있겠지. 앞지르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는 게 재미있어. 다들 경주하는 것 같잖아. 이 악물고 앞만 보고 걷고 뛰는 경주마 같지. 열심히들 살고 있구나, 지기 싫어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사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고된 일이야. 뭐 하나 쉽게 풀리는 게 없어. 10대에는 20대가 되면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잖아.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아마 50대나 60대가 돼도 고민하고 불안한 건 마찬가지 아닐까? 고민 없이 오직 행복하기만 한 사람은 본 적이 없는걸. 앞으로도 내가 가진 고민과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겠지. 사라지더라도 또 다른 고민과 불안이 나타날 테고. 예전에 이해영 영화감독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해. “넌 영원히 안정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살 만할 거야.” 최근 들어서야 그의 말에 공감하고 있어. 그것들이 사라지지 않지만, 난 아직 바닥으로 추락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 괜찮은 상태가 아닐까? 어쨌든 내일도 오늘처럼 걷고 고민하고 전투하며 살아가겠지.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일 테고. 잔인한 말일 수도 있지만 나 혼자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이 내겐 큰 위안이야.



나 혼자 아픈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나면 한결 앞이 선명하게 보이는 기분이야. 넌 어때? 네 앞길이 어떨지는 알 수 없어. 당장 내 미래도 알 수 없으니까. 하지만 계속 걷는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 걷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그대로 사라질지도 모르잖아. 사라지지 않고 계속 걸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꼭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지 마. 그냥 네가 좋아하고 해야 하는 일들을 즐겨봐. 잘되든 아니든 일단 걸어보는 거야. 네가 원하는 길이 나오지 않는다고 섭섭해하지는 마. 계속 걷다 보면 다른 길이 널 반겨줄 테니까. 그러니, 일단은 걸어보자. 나도 그렇게 해보려고. 시간 여유가 있다면 가끔은 천천히 걸어봐. 그럼 네게 익숙한 길에서 전혀 낯선 풍경과 마주하게 될지도 몰라. 환하게 웃는 행인의 표정에서, 카페의 향긋한 원두 냄새에서 넌 네가 그토록 바라던 행복을 만날 수도 있어. 물론 나와 함께 걸어준다면 더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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