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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n Feb 25. 2024

정신력을 믿지 않기로 했습니다

정신은 원래 강할 수가 없어

갑자기 루틴이 무너졌다. 하루 이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기기에는 꽤 오래되었다. 그동안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힘은 무엇이었을까. 소속이 없는 사람에게 하루의 동력을 만들어내는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가. 이번 작심삼일은 유난히 길었던 것뿐이었을까. 작지만 좋은 습관들을 하루하루 적립하듯 성취해 나가는 것이 올해 결심한 삶의 태도인데 고작 딱 하루, 새벽까지 쇼츠나 알고리즘에 휩쓸렸다고 이렇게 속절없이 스러질 수가 있는 건가. 내 나약한 의지를 자책하다가도 억울해지고 이렇게 사소한 습관조차 유지하지 못하는 정신력이라니, 갑자기 소중했던 휴식기가 생산성 없는 시간처럼 쓸모없이 느껴졌다.


안된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시간인데 아무것도 안 남게 할 수는 없지.

이럴 때 제일 좋은 방법은 운동이다. 가벼운 운동은 안 된다. 체력에 한계가 느껴질 만큼 고강도 운동을 해서 몸의 에너지를 소진한다. 시작이 어려워서 그렇지 운동을 하다 보면 보통은 나약한 정신력이 건강한 신체에 지고 만다. 유난히 시작이 힘든 날에는 집에서 운동하더라도 운동복으로 꼭 갈아입는다. 무슨 상관이냐 할지 몰라도 상관이 있다. 정신이 정신을 못 차릴 때는 몸에 닿는 옷의 촉감, 환기시킨 창문으로 들어오는 깨끗한 공기, 마실 물의 온도까지 미세한 것들이 모여 동력을 만든다. 땀에 절은 몸으로 샤워를 하고 나면 무기력과 우울은 분해되듯이 물에 씻겨나간다. 이토록 유약한 것들에 지고 있었구나.


또 다른 좋은 방법은 할 일을 하는 것이다.

호주로 이민을 간 친구가 유튜브를 시작했다. 코알라와 캥거루가 뛰어다니는 광활한 자연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캠핑도 하고 테라스에서 기르고 싶은 식물을 기르면서 일상을 기록한다. 재밌는 걸 시작했구나 싶어 봤는데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다. 15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친구를 모르는 사람들이 이걸 흥미 있게 보게 될까 생각이 들어서 이런저런 어줍잖은 훈수를 두고 서서히 관심이 사그라들었다.


그러다 친구가 구정을 앞두고 한국에 들어온다고 해 만났는데 가는 곳마다 사부작사부작 영상을 찍어대서 참 열심히도 하네, 마냥 귀엽다고 생각했다. 대구가 고향인 친구는 호주에서 인천으로, 인천에서 서울 여기저기, 그리고 대구에서 다시 인천으로 참 부지런히도 다니면서 보고 싶던 얼굴들을 만나고 엄마가 해준 따듯한 음식도 먹고 그리웠던 것들을 눈에 담아 갔다. 그리고는 곧 호주로 돌아가서 한국에서 찍은 영상을 편집해 올렸다. 영상 마지막에는 4박 5일 부지런히 이동한 거리를 일일이 기록해 크레딧처럼 넣어놨는데 거기까지 보고 나니 참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이전에 친구가 올린 영상들에서는 더운 나라지만 이따금씩 이방인으로서 냉기를 느꼈을 친구의 일상이 보였다. 그래도 그저 잘 살고 있겠거니 하고 넘겼는데 한국에 잠시 돌아온 친구는 맛있는 걸 먹으며 웃고 떠들고 카메라 뒤에서 미소 짓는 모습이 상상될 만큼 행복해 보였다. 영하 10도를 웃돌던 한국을 떠나 다시 영상 30도의 호주 땅으로 돌아가 그 4박 5일을 떠올리고 편집하면서도 그 친구는 행복했을 것이다.

헤맨 만큼 자기 땅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게도 좋아하는 한국음식과 친구들, 가족들을 다시 그리움으로 남겨두고 자기 세계를 넓혀가려 다시 먼 땅으로 돌아간 친구가 나를 움직이게 했다.


영상을 끄고 침대에서 일어나 환기를 시켰다. 나도, 지금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해야지.

그립고 달콤한 것들은 언젠가 반드시 올 것이라 믿으면서.

하기 싫어 죽겠을 때는 하면 된다. 하기 싫다는 건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인데 미루다가 보니 죽겠을 때까지 가는 거다. 그럴 땐 보통 해버리면 된다. 누적의 힘은 무서워서 작은 패배감이 쌓이면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작은 성취감도 그렇다. 적립하듯 꾸준히 하다 보면 언젠가 큰 성공이 보상해주지 않을까. 성공이 아니어도 괜찮다.

적어도 나약한 정신 따위에 이길 방법들은 배웠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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