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제일 빠른 예약 날짜가 '내년'이라고요?
요 근래 좀 아팠다.
독일에 오기 전에 한약을 3첩이나 지어서, 태어난 이래로 가장 열심히 먹고 겨우 건강 밸런스를 맞춰놓았다고 생각했는데, 마음도 몸도 너무 무리한 건지 면역 밸런스가 붕괴되었던 것 같다. 보통 병원을 바로 가는 게 가장 좋다고 하는데, 독일에서 병원을 가는 일이 쉽지가 않아서 이래저래 고생했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독일의 병원 시스템은 우리나라와 많이 다르다.’
‘보험에 따라 갈 수 없는 곳도 있다.’
‘꼭 예약을 해야 하고 예약을 한다고 해도 바로 갈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이 정도가 독일 병원에 대해 내가 주섬주섬 주워 들었던 내용들이었다. 한국에서도 병원에 가는 걸 싫어하기도 했고, (싫어도 가긴 가야 했지만…) 뭐든지 닥쳐야 하는 성미 때문에 미리 상세하게 알아봐 놓지는 않았었다. 무엇보다도 한국에서보다 훨씬 잘 챙겨 먹고 있고 상대적으로 낮은 스트레스 환경에서 지내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아플지 생각을 못하기도 했다. 아프기 시작한 게 7월 말쯤부터였는데, 처음엔 검색 포털 정보에 의존하면서 집에서 버텨보려고 했다. 그러다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도무지 견딜 수 없을 지경까지 코너에 몰리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병원을 찾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가장 먼저 든 걱정은 '병원을 찾는 일'보다도 ‘보험’이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한국에서 ‘해외 사고 및 질병에 대해 일정 수준 이상의 보장을 해주는 보험을 가입하고 그 서류를 증빙 서류로 제출해야만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애초에 독일에 오기 전부터 한국 보험회사의 해외에 적용되는 보험을 들어왔다. 처음엔 그것만으로도 뭔가 안심이 되었는데, 막상 독일에 오고 나니 '공보험이면 안 받아준다는 병원이 있다더라', 아니면 '사보험도 저렴한 걸 들면 안 받아주는 병원이 있다더라’ 등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은 통에 독일 병원에서 내 보험을 인정해주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인정이 안되면 병원비가 비싸질 거고, 일단 병원비를 낸다고 해도 내가 든 보험이 이 병에 대해 커버를 해줄지도 의문이었다. 메일을 뒤적거려 보험 약관을 이리저리 뒤져봤지만 명확한 범주에 들지가 않았다. 지나친 걱정은 몸을 더 안 좋게 만들 것 같아서 일단 보험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었다.
일단, 병원을 찾기로 했다. 독일 친구에게 SOS를 청하자 링크를 하나 보내준다. 보내준 링크를 타고 들어가 보니 독일에서 지역별로 의사를 찾을 수 있도록 검색이 가능한 ‘jameda'라는 웹사이트였다. 깔끔한 디자인과 이용하기 편리하게 구성되어 있는 편이라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독일식 알파벳으로 읽으면 발음이 ‘야메다’가 돼서 좀 웃겼다. 야메다… 야메다… 야매… 다…?)
다행히 친구가 찾아준 곳은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 정도의 병원이었다.
친구는 어서 병원에 가보라고 했지만, 나는 당장 예약부터 막막해져 오기 시작했다. 독일 병원은 꼭 예약을 해야 한다고 어렴풋이 들었었고, 전화를 걸어도 상대가 영어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그렇다고 내가 독일어가 되는 상황도 아니었으니. 호기롭게 타지에 와서 사는 사람 치고는 이런 부분에선 많이 소심한 편이라 엄청난 스트레스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고민만 하다 결국 친구에게 물어봤더니 답이 의외로 간단했다.
나: 그런데 예약해야 되는 거 아냐?
친구: 아냐, 급하면 그냥 가서 기다려도 돼.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나: 아? 그냥 가도 되는구나. 알았어. 그럼 좀 있다 챙겨서 가볼게.
일단 밥이라도 잘 챙겨 먹어야겠기에 꾸역꾸역 밥을 지어먹고 11시가 좀 넘어서 집을 나섰다. 병원 시간을 확인하려고 페이지를 뒤적거려 봤으나 아파서 정신이 없어서 그랬는지 못 찾았다. '일단 가까우니 그냥 가자!’라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늘 지나다니던 지하철역에서 우체국 가는 길 중간에, 병원은 병원인 듯 병원이 아닌 듯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나라처럼 커다란 간판이 휘황찬란하게 걸려있지 않다. 주소를 보고 찾아가서 건물 입구에 적힌 이름을 보고 찾아내야 한다. 이 곳은 병원 이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거의 다 의사들 이름을 쓰고 있어서 이름이 엄청나게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진다. 겨우겨우 스마트폰에 있는 글자와 건물에 있는 이름을 비교해보고는 ‘찾았다!’하는 기쁨도 잠시,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한국 병원처럼 12-1시 정도의 점심시간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내가 찾아간 병원은 오전 9시 ~ 오전 11시 진료 후 문을 닫은 뒤 오후 3시에 오후 진료를 보기 위해 문을 여는 곳이었다.
나중에 더 찾다 보니 그것도 병원마다 다 달라서 꼭 별도로 확인을 하고 가야 한다. (8시 ~ 18시로 풀타임으로 나와있는 곳들도 있다) 어쨌든 내가 이걸 본 건 11시 30분. 이미 문을 닫았을 시간이기에 바로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오후 3시에 맞춰서 다시 찾아갔다. 병원은 2층에 있었는데 한국처럼 안이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문도 아니고, 간판도 손바닥만 하게 있어서 어디가 그 병원인지 구분하느라 또 어리둥절. 겨우 어느 문이 병원 문인지 확인하고 문을 열려고 하는데 문 앞에 붙은 공지가 심상치 않다.
뭐라고 뭐라고 적혀있는데 그중 알아볼 수 있는 건 숫자. 오늘 날짜가 포함되어 있다. 미심쩍어서 구글 번역기 앱을 열고 카메라 번역을 시도해보니 대충 휴가 갔다는 내용…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에 왔을 때 여기까지 한 번 올라와보는 건데.
같은 곳을 두 번이나 헛걸음을 하니 안 그래도 없는 기운이 쭈우욱 빠져나갔다.
우선 약국에 가서 임시로 진정시킬 수 있는 약을 사기로 했다. 네이버를 뒤져서 약 이름을 하나 알아냈다. 그런데 그 약마저도 동네 약국이 작아서 주문을 해야 한다길래 중심가까지 나가서 사 왔다. 함부르크에 왔던 초반에는 시청 쪽 번화가를 내 집 드나들듯 다녔지만, 진짜 내 집을 얻은 이후로는 여기까지 나가는 것도 귀찮아서 잘 안 가게 된다. 이 날도 약 때문에 아주 오랜만에 나갔는데 피곤하긴 했지만 예쁜 하늘과 활기찬 사람들 덕에 에너지까지 얻어서 왔다.
약으로 겨우 진정을 시키며 약 일주일 정도 오전 시간은 병원 찾기에 투자하고 오후에는 일을 했다. 약국에서 산 약이 약발이 좋아서 그냥 나았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빌면서 (병원비가 두려웠다) 아침마다 병원에 전화를 해보거나 근처 병원을 찾아갔다. 며칠 뒤에 지난번에 두 번 헛걸음 한 그 병원의 휴가가 끝나서 찾아갔더니 퇴짜를 맞았다. 휴가가 끝난 직후라 너무 바빠서 새로운 환자를 받지 않는다나 뭐라나. 뭔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른 병원이라도 추천해줄 수 없냐고 물었더니 단칼에 거절하며 직접 인터넷에서 찾으라고 했다. 독일 와서 겪은 사람 중 가장 쌀쌀맞은 사람이었다. 그냥 무뚝뚝한 사람이겠지, 바빠서 그렇겠지, 하면서도 아픈 마음에 더 서럽다.
한국에서는 아프면 그냥 동네 가까운 병원 문 열고 들어가서 기다리면 됐는데... 한국 생각이 나자 울컥 더 서럽다. 타지에서의 삶을 고려할 때 아마 가장 큰 요인 중 하나가 병원일 것이다.
미국에서 지냈을 때도 오븐에 화상을 입어 병원을 간 적이 있는데 보험 카드가 안 나왔다고 진찰을 거부당한 적이 있었다. 보험 가입이 돼있었는데도 카드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거였다. 열이 받아서 약국에 가서 화상에 좋은 약이랑 치료 도구는 전부 사서 집으로 돌아왔었다. 다행히 흉터는 남지 않았지만, 이렇게 생각이 나는 걸 보니 마음의 흉터는 아직도 남아있나 보다. 독일도 보험만 잘 들어있으면 혜택이 참 좋은 나라긴 한데, 내가 멋도 모르고 일단 온 걸 어쩌랴. 예전 같음 기분이 안 좋아지고, 한국에 가네 마네 고민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제는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에 따라야지'라고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결할지 방법을 찾는데 더 집중하게 되었다.
약이 다 떨어져서 약국에 다른 약을 또 사러 갔다. 두 번째 사는 거라고 넌지시 말을 건네니 병원에 가봐야 하지 않겠냐고 약사가 답한다. 애쓰는 중이라고 했다. 대답 대신 안타까운 표정이 돌아온다. 그 표정만으로 위안이 되었다. (그래, 친절한 사람이 더 많아)
집에서 걸어서 갈만한 곳은 다 가봐서 이제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집이 함부르크 중심가에 가까운 편이라 병원들이 손님이 많은 것 같고, 외곽의 병원일수록 여유가 있을 것 같은데 아픈 몸을 이끌고 도박을 하러 멀리 있는 병원까지 가는 건 아무래도 내키지가 않았다.
결국 전화를 들었다. 예상되는 대화 내용을 구글 번역으로 영어-> 독일어 번역을 하고 메모장에 주르륵 적어놓고 몇 번이고 읽는 연습을 한 뒤에야 전화를 걸 수 있었다. 내 경험 상으로는 영어로 무난한 대화가 되는 병원 접수처는 거의 없었다. 영어를 아예 못하시는 건 아니고 약간 더듬더듬해주는 정도인데 본인들이 말하다 답답하니까 독일어로 바뀌더라. 그래서 대부분 독일어로 진행되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내 발음은 알아들어주신 것 같았지만, 되돌아오는 말을 내가 알아듣지 못한다는 게 함정이었다. 대충 ‘미안하다’, ‘nicht(영어의 not)’ 등의 부정어가 들리면 ‘여기도 안되나 보다’하고 눈치로 알아듣고 고맙다고 하고 끊기를 반복했다. 어떤 곳은 시내 중심가 쪽 병원이었는데 제일 빠른 예약이 심지어 ‘내년’이라고 했다. 너무 놀라서 두배 큰 목소리로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NEXT YEAR?
(왓더...라고 할 뻔했다)
병원 가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다시 독일의 병원 시스템에 대해 조금 더 조사를 해보았다. 독일의 병원 구조는 개인 병원-전문 병원-종합병원으로 나뉘어 있다고 했다. 어디가 안 좋은지 잘 모르겠을 때 개인 병원을 가고, 어디가 아픈지 명확해지면 전문 병원으로 간다고 하길래, 나는 내가 어디가 안 좋은지 너무 정확히 알아서 전문 병원부터 가려고 했는데 그게 좀 무리수였던 것 같다. 다른 지인에게 상담을 했더니 예약 없이 빨리 보려면 하우스 닥터로 가는 것이 더 나을 거라고 이야기해줬다. 이번에는 구글에서 Hausarzt (독일어로 House Doctor)를 검색했다. 집 근처에 있는 다양한 병원들이 나왔고 그중에서도 내과, 안과, 치과 등의 큰 범주는 나눠져 있었다. 운 좋게 집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하우스 닥터가 있었고, 전화를 해봤으나 받지 않았다.
'하우스 닥터는 정말 집에서 혼자 하시는 작은 병원이라 진찰 보시느라 전화를 못 받나?'
라는 생각으로 직접 찾아가 보았으나 나를 반기는 건 또...
Urlaub!
역시 언어는 반복 학습이 중요하다.
그래서 또 함부르크는 나에게 '휴가'는 'Urlaub'라는 걸 가르쳐 주려고 나를 이 곳으로 이끌었나 보다.
또, 휴가 공지였다.
옆집에 병원이 또 있었는데 거기도 휴가였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왜냐면 계속 안 나았기 때문에... (흑흑)
다시 다른 하우스닥터를 찾았다. 이번엔 더 가까운 거리 5분 거리였다. 전화는 하나마나겠다 싶어서 그냥 찾아갔다. 그냥 주택가들 사이에, 그리고 정말 주택용 건물 안에 있기 때문에 평소에 지나다닐 때는 이 곳이 병원인 줄은 상상도 못 하였었다. 가방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뒤적이고 있는 할머니 곁을 지나서 조심스럽게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행히 문은 열려 있다. 이번엔 안된다고 해도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져서라도 진찰을 받고야 말겠다고 단단히 각오를 하고 들어갔다.
쓰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져서 뒷이야기는 2편에서 마무리하려고 한다.
(8.12 업데이트)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봐주셔서 2편을 후다닥 작성!
2편: 독일어 초보가 독일 의사를 만나다
마지막으로 독일 병원 예약에 대해서 내 경험을 바탕으로 요약해보면...
- 예약, 하면 베스트지만 급하면 그냥 가서 기다려보는 걸 시도해도 된다.
- 단, 너무 바빠서 새로운 환자를 아예 안 받는 병원도 있다.
- 중심가 병원일수록 바쁘기 때문에 가능하면 중심에서 먼 쪽으로 가는 게 확률이 높을 것 같다.
(이건 병원뿐만 아니라 동사무소, 은행 모두 해당되는 사항)
- 정말 위급한 상황의 경우, 종합 병원이나 대학 병원의 응급실로 가면 된다.
(앰뷸런스의 경우 보험이 가입되어 있다면 비용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하지만 보험이 가입되어 있지 않다면…)
- 본인의 몸이 안 좋은 곳이 있다면 검진을 위해서라도 미리미리 예약을 해둔다.
못 가게 될 경우에는 미리 취소만 해주면 된다고.
결론. 모두 아프지 말고 건강합시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