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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Jan 03. 2021

성탄절의 긴급알림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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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성탄절은 분주했다. 성탄 예배와 성탄 기념행사 때문이다. 오랜 전통을 깨고 2020 성탄절은 분주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성탄 기념행사는 애초에 계획되지 않았고 성탄 예배는 온라인으로 진행될 예정이었으니. 그러나 이번 성탄절은 다른 모양으로 분주했다. 긴급 알림톡이  시작이었다.


온라인 성탄 예배가 시작되기 19분 전, 애들 학교에서 알림톡이 왔다.


"00 초등학교 알림장

제목: 긴급) 교직원 중 코로나19 양성 관련 안내

알림: 긴급하게 안내드립니다. 현재 00 초등학교 교직원 중에서 코로나19 관련 검사 결과 양성으로 판정되었습니다(명색이 학교 알림톡인데 비문이다. 긴급했다는 반증인가…). 현재 보건당국과 대책을 협의 중이니 이 문자를 받으시는 분들은 이동을 자제하시고, 가정에서 대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추가 안내사항이 있으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교직원이 확진되었다는데 몇 학년 담임인지, 방과 후 교사인지, 사무직원인지 아무 설명이 없다. 답답하고 불안했다. 벼락같고 두루뭉술한 알림톡 덕에 학교엔 문의 전화가 폭주 중일지 싶다. 거기다 내 목소리까지 얹을 것 까진 없겠지. 나는 알림톡의 마지막 문장에 기대 보기로 했다.


성탄 예배를 드리기 위해 가족들과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았다. 화면을 쳐다보던 내 눈이 아이 쪽으로 굴러갔다. 우리 애들 괜찮을까? 확진되었을 수도 있겠지? 그럼 우리 가족 전부 확진자 될 수도 있겠구나. 모두 보건소 가서 검사받아야 하나? 학교에 선별 진료소를 만들려나? 자가 격리해야 할 수도 있겠지? 식재료도 온라인으로만 주문해야겠네…. 마음속에 설레발이 분주히 오갔다.


그래도 이 날은 크리스마스였다. 1214명이라는 최대 규모의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고 걱정을 주렁주렁 상상하게 만드는 알림톡을 받았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날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바이러스학자 도널드 버크에 의해 '심각한 위협'으로 예고되었다. 24년 전의 예언이었다. 그러나 그 경고 알림은 정치, 경제, 연예, 스포츠 뉴스 뒤로 밀려났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엄중한 경고가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는 예고는 구약에 300번 이상 등장한다. 수천수백 년 전부터의 예언이었다. 그분은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지 못했다. (요한복음 1:10)

온다고 약속한 코로나 바이러스와 예수님은 정말로 와 버렸다. 방문을 미리 고지한 친절한 손님이었으나 사람들은 이 존재들을 벼락같은 알림톡인 양 불쾌하게 여겼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지 신경을 곤두세웠다. 코로나는 없애도 되고 예수님은 그러면 안 되는 대상이라는 게 둘의 차이지만.


생애 첫 온라인 성탄 예배가 시작됐다. '비대면'과 '온라인'은 교회에도 불시착하듯 정착했다. 다행히 예수님과는 여전히 '대면' 상태다. 예수님의 탄생을 고지한 천사는 그분의 별칭을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해주었다. 높은 곳에 계시던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살기 위해 낮은 곳에 태어나셨다. 예수님은 지금도 장소와 상황을 뛰어넘어 주의 자녀들과 함께 계신다.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님은 낮은 곳에 처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셨다. 그중 한 사람이 사마리아 여인이다. 예수님과 대화하던 그녀는 당시에 뜨거웠던 이슈를 꺼냈다. 예배드리는 장소에 대한 문제였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을 '예배드리기에 옳은 장소'라고 각각 주장하던 시절이었다. 사마리아 여인은 둘 중 뭐가 맞는지 예수님께 넌지시 여쭈었다. 2천 년 전 여인의 저 질문은 지명만 바뀌어 오늘의 교계와 세상으로 소환됐다. 예배드리기에 옳은 장소는 어딥니까? 교회당이 맞습니까, 비대면이 맞습니까?


예수님은 둘 다 아니라고 하셨다. "이 산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올 것인데, 지금이 바로 그 때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시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만 하오."(쉬운 성경/ 요한복음 4 : 21~24)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을 내리 두 번 말씀하신 후 "반드시"라는 부사를 붙임으로 삼중 강조를 하셨다.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게 무엇이기에 이다지 힘주어 말씀하셨을까.


위의 말씀에 따르면 '영'은 하나님을 지칭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진리'는 예수님을 지칭한다. 사마리아 여성과의 대화가 기록된 요한복음의 다른 부분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진리'라고 정의하셨기 때문이다. "내(예수님)가 바로 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쉬운 성경/ 요한복음 14:6하) 예수님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나 다름이 없"다며 자신과 하나님을 동등하게 여기셨다.(쉬운 성경/ 요한복음 14:9하) 또한 성령을 가리켜 "진리의 영"이라고도 하셨다.(요한복음 14:17) 이 설명들을 합치면  '진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 예수님 · 성령님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영'과 '진리'는 서로 다른 두 도구로서 제시된 게 아니다. 영이자 진리가 되시는 하나님을 다른 표현으로 반복한 것이다. 예배에서 하나님이 중요함을, 반복을 통해 강조하신 것이 아닐까.


한편 "영과 진리"라는 말씀은 다수의 영어 성경에 "영과 진리 안에서"라고 번역되어 있다. NIV, NLT, KJV, NASB 성경 : "in spirit and (in) truth" 예수님은 그리심산 '위에서'나 예루살렘 '안에서'가 아닌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드리라고, 우리가 죽고 못 사는 '장소'의 맥락을 끌어다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영과 진리로 예배" 하라는 말씀을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예배드려라"라는 내용으로 나는 이해한다. 그 어떤 다른 대상이 아닌 오직 하나님 안에서, 유한한 육체와 달리 무소부재의 영이신 하나님 안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인 하나님 말씀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예배드리라는 가르침이 아닐까. 성경 말씀의 깊이를 내가 다 가늠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가르침 속엔 예배 장소나 형식에 대한 문제가 끼어들 틈은 없어 보인다.


성도들의 가장 큰 축제 중 하나인 성탄절에 나는 '집 안에' 있다. 아름답게 장식된 교회와 시끌벅적한 행사는 가뭇없고 가족들과 조촐하게 모여 앉았다. 나는 '교회 건물 안에서'나 '모니터 앞에서'가 아닌 '하나님 안에서' 예배드리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했다. 긴급 알림톡이 파생시킨 걱정들을 잘라내고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따라 불렀다. 최대 규모 확진자, 우리 애들 학교에서도 나온 확진자, 산으로 가는 한국 교회의 모습, 나의 내면의 지질한 분투, 보이지 않는 앞날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구주의 오심이 그래서 기뻤다. 예수님은 어둠 속으로 오신 빛이므로.






덧붙임.

1. 저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일반 성도입니다. 위의 성경 해석은 개인 성경 묵상이므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2. 아이들 초등학교에서는 확진된 교직원과 접촉한 학생, 교직원, 유치원생을 대상으로 코로나 검사를 실시했습니다. 다행히 모두 음성으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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