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에 찾아온 어려움

by 녹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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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나는 한 달 내내 코피를 흘리는 중이었다. '줄줄'은 아니고 '찔끔찔끔' 코피가 계속 났다. 콧물은 더 오랫동안 흘리고 있었다. 어딜 가든 화장지를 손에 들고 다녔다. 24시간 내내 흐르는 콧물과 코피 때문이었다(자다가도 코를 풀어야 했다). 책상 옆엔 거대한 비닐봉지를 놔두고 거기에 코 푼 휴지를 버렸다. 순식간에 차오르는 휴지를 감당하기엔 우리 집 쓰레기통은 그릇이 작았다. 멎을 생각이 없는 콧물과 코피는 일상생활에 톡톡한 지장을 주는 누수였다. 콧물이나 코피뿐이었다면 참을 수도 있었을거다. 그러나 통증을 참는 건 어려웠다. 코에 인접한 양옆의 볼이 너무 아팠다. 힘껏 날아온 딱딱한 공에 얻어맞은 자극을 느꼈다. 하루 종일 그 부분이 묵직하고 욱신거렸고, 팔딱 팔딱 뛰는 맥마저 감각됐다. 그 통증에 비하면, 휴지와의 마찰로 헐어버린 코의 빨간 피부는 댈 것도 아니었다.


코에서만 피가 난 건 아니었다. 잇몸에서도 피가 났다. 부은 잇몸은 내 고질병이다. 학창 시절 때부터 엉망이었다. 특히 왼쪽 아랫잇몸은 365일 부어 있었는데, 잇몸의 높이가 어금니의 높이와 똑같을 만큼 부풀어 있었다. 그쪽으로 뭘 씹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오른쪽으로만 씹은 덕분에 내 얼굴은 비대칭이 되었다. 3년 전에도, 늘 그래왔듯, 잇몸은 너덜너덜했다. 살짝만 건드려도 피 맛이 났다.


몸 여기저기도 쑤셨다. 한쪽 팔은 몇 개월째 올라가질 않았다. 그때의 나는 만 사십 세가 되기 전이었다. 그런데 벌써 오십견이란 말인가. 팔을 들 수 없는 불편함은 컸다. 낫고 싶어서 스트레칭과 팔 운동을 꾸준히 했다. 그러나 통 좋아지지 않았다. 머리 감을 때나 옷 갈아입을 때마다 나는 아야야야 소리를 냈고 미간을 찌푸렸다.

허리도 미세하게 계속 아팠다. 아이를 안고 업으며 키우느라 허리가 닳았다. 아이를 업다가 허리를 삐끗해서 거동 못할 만큼 곤란했던 적도 있었다. 수년간 시달렸던 허리는 아이 업는 일을 졸업한 후에도 쉽게 복구되지 않았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머리가 꼭 아팠다. 참을 수 없을 땐 타이레놀을 먹어야 했다.


그러나 그 즈음 가장 큰 스트레스는 콧물도 코피도, 어깨 통증이나 두통도 아니었다. 불면증이었다.

나는 불면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한번 잠들면 밖에서 벨을 아무리 눌러도 듣지 못했다. 잠을 잘 잤고, 오래 잤고, 늘 더 자고 싶었다. 커피를 많이 마셔도 잘만 잤다. 그랬던 내가 잠을 못 자게 되니 황당했다. 하루에 한두 잔 마시던 아메리카노를 끊어 보았다. 그래도 잠이 오지 않았다. 잠들지 못하는 괴로움을 이해하게 되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자니 컨디션은 곤죽이 되었다.


중병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하루를 겨우겨우 사는 느낌이었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고, 음식을 제대로 씹을 수 없고,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고,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는 일이 한 번에 겹쳤다. 삶의 질이 폭락했다. 그러나 내 육체에 대해 불평할 양심은 없었다. 나는, 불량한 음식을 내 몸에 집어넣은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공장에서 찍어 낸 싸구려 빵을 사 먹었다. 저렴하고 흰 빵에 달달한 잼을 두껍게 발라 먹었다. 폭신한 빵은 어떤 종류든 다 좋았다. 초콜릿도 좋아했다. 초콜릿이 발린 과자도 좋아했다. 물론 초콜릿이 묻지 않은 과자도 환영했다. 라면도 좋아했다. 식구들 없이 나 혼자 점심을 때워야 할 땐 거의 라면이었다. 라면에 계란을 한 알 깨 넣고 김치와 함께 먹었다. 남은 국물엔 당연히 밥도 말아 먹었다. 이와 잇몸이 부실했기에 부드러운 면 요리라면 뭐든 좋았다. 스파게티, 냉면, 칼국수, 짜장면, 짬뽕 등등. 피자와 치킨도 한 달에 한두 번씩 먹었다. 햄과 소시지도 좋아했다. 케첩과 머스터드를 듬뿍 발라 먹는 핫도그도 좋아했다. 우유, 치즈, 요플레, 아이스크림 같은 유제품도 좋아했다. 고기는 엄청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있으면 잘 먹었다. 간편하게 먹을 수 있고, 자극적인 맛을 가진 것이라면 어떤 음식이든 좋았다. 신선한 채소나 과일, 통곡물 같은 것이 내 식단에 끼어들 틈은 별로 없었다.


저런 식으로 먹으면서 건강한 몸을 바라는 건 도둑놈 심보라고, 나도 생각은 했다. 알면서도 계속 먹었다. 입이 즐거워서, 먹는 동안 행복해서, 채소를 썩 좋아하지 않아서, 채소나 과일을 씻고 다듬는 게 귀찮아서 그랬다. 그러는 동안 마음의 죄책감과 몸의 불편함이 내 뱃살처럼 부풀었다.


이렇게 대책 없이 계속 먹다간 무슨 병이 걸려도 걸릴 것 같았다. 병이 올 때까지 나를 방치하는 건 무책임한 짓임에 분명했다. 이렇게 살 순 없었다. 내 몸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어린 자녀들의 엄마이다. 책임져야 하는 가정이 있다. 얽혀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몸이 아프게 되면 나 하나조차 책임질 수 없다. 그러면 내 분량의 삶이 다른 사람들의 짐으로 전가되어 버린다.


자신의 삶에서 자립하지 못한 사람들이 내 집안엔 몇 명 있었다. 어려서부터 그들을 보며 자랐다. 그들이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그들은 가족들의 꾸준한 걱정거리였다. 그들의 부재한 생활력을 메꾸느라 누군가는 오래도록 희생해야 했다. 그들과 다른 가족들의 싸움도 잦았다. 잊히지 않는 싸움과 갈등들이 많다. 멱살을 잡고 흔드는 두 사람을, 만삭의 몸이었던 내가 뜯어말렸던 일도 있었다. '제 앞가림'이라는 화두는 나의 뼈와 살에 새겨진 이슈가 되어갔다.


살다 보면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있다. 사람은 당연히, 혼자만의 힘으로는 살 수 없다. 몸이 약한 것, 병을 앓는 것이 전적으로 개인 탓이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의 걱정은, 충분히 예방하고 대처할 수 있는 상황을 나의 나쁜 습관으로 인해 막지 못하는 데 있었다.


나는 아픈 게 싫고 불편했다. 이러다 큰 병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불안함도 있었다. 나쁜 컨디션 때문에 일상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몸이 더 망가져서 내 삶을 책임지지 못하게 되면 너무 괴로울 것 같았다. 가족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자라면서 목격했던 뾰족한 갈등을 내 손으로 재현하고 싶지 않았다.


이 모든 부작용을 알면서도 좋지 않은 음식을 계속 먹는 내가 한심했다. 그 음식들은 나의 부피만 착실하게 늘려놓았지, 한 번이라도 날 싱싱하게 만들어주지 못했다. 심지어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었음에도 내 몸은 골골댔다. 하루 세 번 이상 먹는 음식들이 하루에 한 번 하는 운동을 우습게 이겨먹었다.


음식을 바꾸어야 했다. 내가 음식에 대해 품은 혐의는, 아니면 말고 식의 개똥 추리가 아니었다. 내겐 경력이 있었다. 음식을 바꾸어서 건강을 다소 회복해 본 흔적이 몸과 기억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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