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s around the Clock>, IDFA 씬 (5)
IDFA 다큐멘터리 영화제엔 다소 특이한 이벤트가 있다.
소위 '다큐멘터리 마라톤'이라고 부르는 <Docs around the Clock>이 그것인데, 저녁 9시부터 아침 9시까지 밤을 새워 다큐멘터리를 연속으로 관람하는 강행군이다.
상영작은 미리 정해놓지 않는다. 영화제 기간 동안 관람한 관객들이 매기는 평점을 합산해 높은 순위에 오른 다큐들을 중심으로 7편을 정해 상영한다. 7편 연속 다큐 관람이라니, 만만하지 않다.
이런 다큐멘터리 영화 패키지 같은 이벤트는 <Docs around the Clock>뿐 만이 아니다. <Best of IDFA>는 일종의 IDFA 영화제의 써머리와 같은 이벤트로, 각 부문의 수상작 등 영화제의 주요 상영작들을 모아 연속 상영한다. 애초에 <Best of IDFA>를 관람할까 하다 머뭇거리는 사이애 매진됐다.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모를 IDFA의 피날레로 12시간 연속 다큐 관람이란 도전은 매력적으로 보였다. 9 - 9으로 시계의 시침이 한 바퀴 돌아가는 동안이란 의미의 <Docs around the Clock>이란 네이밍도 멋졌다.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12시간 관람의 준비
이벤트가 열리는 IDFA의 심장, Tuschinski 극장에 도착했다. 보통 저녁 8시쯤이면 저녁을 먹고 마지막 다큐 하나 정도 보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대인데, 장장 12시간의 관람을 이제 시작하려니 숨이 막혀왔다.
물과 먹거리를 사기 위해 근처 편의점에 들렸다가 극장으로 들어갔다. 로비에는 같은 이벤트를 관람하는 듯한 관객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이벤트 티켓을 어플로 확인하고 손목에 입장 띠를 찼다. 마치 클럽에 온 것처럼 느끼게 하는 파란 팔찌는 너 이제 여기서 아침까지 못 나간다는 족쇄 같기도 했다.
상영관인 3관으로 올라가 분위기를 확인했다. 다큐멘터리를 밤을 새워 보는 사람들이 그리 많을까 싶었지만 짧은 생각이었다. 대략 객석의 절반 이상은 차있었다. 암스테르담 관객들의 다큐멘터리 사랑은 정말이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을 보니 배낭에 물과 간식을 잔뜩 챙겨 온 것을 볼 수 있었다. 다들 적당한 좌석에 좌우로 간식거리 등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어디에 앉을까 고민을 좀 하다가 중앙 좌석을 선택했다. 좌석의 한 블럭이 매우 길어서 화장실을 가긴 좀 불편하겠지만 그래도 시야가 제일 좋은 곳에서 보자는 생각에 가운데를 찜했다.
충격적인 암스테르담 팝콘
다소간의 먹거리 외에 이번엔 팝콘을 사기로 했다. 원래 영화는 '팝콘각'으로 보는 게 제맛인데, 영화제 기간 동안 여기 팝콘을 한 번도 시도 못한 게 아쉬웠다. 그래서 다큐멘터리 마라톤을 팝콘과 함께 즐기겠다는 의미로 1층 매점에서 구매했다.
충격적이었다.
평소 국내 멀티플렉스 극장의 갈릭버터맛이니 스위트치즈맛이니 하는 익숙한 맛을 기대한 것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암스테르담 팝콘은 우리가 아는 팝콘이 아니었다. '강냉이'였다.
맞다. 그 바로 떠오르는 강냉이의 맛이다. 팝콘이라기엔 지나치게 거대한 알갱이와 푸석한 식감, 게다가 암스테르담의 버터맛 팝콘은 그 강냉이에 버터 소스가 얹힌 팝콘이라 그 맛이 적응하지 쉽지 않았다. 암스테르담에서 씹히는 이 구수한 맛이 참 어색했다.
그래도 다큐를 보는 동안 '팝콘각'의 느낌은 살리기 위해 부지런히 인증샷을 찍으며 먹었다. 보통 영화 한 편을 보더라도 중간쯤이면 팝콘 한 통을 다 비우곤 하는데, 이 팝콘을 가장한 강냉이는 12시간을 지나도록 다 먹지 못했다. 유럽 와서 음식은 가리지 않았는데 팝콘을 가리게 될 줄이야...
꼭 먹지 않아도 영화 보며 깔깔거릴 때 한 손에 얹혀있는 팝콘 박스는 왠지 모를 만족감을 준다. 관상용 팝콘인진 모르지만 이런 암스테르담 스타일 팝콘과 함께하는 밤샘 관람이 언제 또 있겠냐는 생각에 나름 즐겼다.
7편의 상영작
출입문엔 7편의 상영작 리스트가 있었다.
IDFA 대상을 수상한 <Nowhere to Hide>부터 관객상을 수상한 <La Channa>, 한국 제작진이 찍은 <Singign withe Angry Bird>, 마지막 <Life, Animated>까지 모두 보고 싶었던 다큐였다. 미리 관람한 작품과 겹치지 않은 건 행운이었다. 2016년 IDFA 관객들이 선택한 다큐들은 어떤 작품들 일지 궁금했다.
다큐멘터리 마라톤의 출발
상영이 시작됐다.
내심 두어 편 보고 졸리면 어떡하나 걱정도 했으나 생각보다 시간이 금방 갔다.
<Nowhere to Hide>와 <Return>이 이라크 내전과 난민의 현실을 다룬 다소 무거운 작품이었음에도, 워낙 충격적인 영상에 시선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아프가니스탄의 참혹한 여성 인권의 현실을 보여주는 <Prison Sisters>은 이 연속 상영에서 발견한 수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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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편의 영화를 본 이후 관객석의 분위기는 다소 가라앉아 있었다. 중동의 잔인한 현실을 세 편 연속으로 맞닥뜨리고 나자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이후 상영된 <Singing withe Angry Bird>을 첫 화면은 또 뭔가 중동스러운 느낌의 배경이었다. 순간 관객석에서 '또 중동이야?'라는 듯한 한숨이 나오는 찰나, 뜬금없는 다큐 속의 김재창이란 캐릭터가 상황을 반전시켰다. 개인적으론 오랜만에 듣는 영상 속의 한국말이 반갑기도 했지만, 일단 캐릭터가 재미가 있었다. 인도 빈민촌에서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그는 아이들에게 'Angry Bird'라고 불린다. 결코 다정하지만은 않지만 자신만의 방법으로 아이들과 호흡하는 독특한 캐릭터에 암스테르담 관객들을 연신 킥킥댔다. 생업에 바빠 아이들과 소통할 여유도 없는 빈민촌의 부모님들까지 모아 가족이 함께하는 합창을 만들어내는 이 다큐는 재미는 물론 감동과 따뜻함을 모두 담아낸 그야말로 수작이었다. 다큐멘터리 마라톤 상영 7편 중에서도 관객들의 가장 뜨거운 반응을 끌어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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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샘 매점
각 다큐 상영 중간엔 15분씩 쉬는 시간을 가진다. 사람들은 너 나할 것 없이 화장실과 1층으로 내려가는데, 1층엔 매점이 밤을 새워 운영 중이었다. 다들 커피나 차를 마시며 브레이크 타임을 가지는 듯했다. 그래도 이런 밤샘 이벤트에 보급고인 매점도 운영하는 건 좋아 보였다. 쉬는 시간마다 내려가서 매점을 기웃거렸는데, 사실 다큐를 몇 편 보고 나자 간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식욕이 없었다. 속이나 달래자고 따뜻한 차를 하나 주문해 마시고 말았다.
다큐멘터리 마라톤에서 낙오란 없다
매점에서 뭐 하나 사고 돌아서면 출구가 보인다. 그런데 출구가 좀 이상했다. 철창이 쳐져있는 것 아닌가.
다큐멘터리 마라톤 중간엔 나갈래야 나갈 수가 없다. 철창으로 아예 막아놓은 게 신기했는지 사람들이 다들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설마 출구를 막을 줄은 몰랐는데, 여기 굉장히 무서운 곳이구나 싶었다. 어차피 새벽에 잘 모르는 암스테르담 밤거리를 걸어 다닐 생각은 없었지만, 철창에 갇혀있는 느낌이 스파르타 기숙학원에라도 온 느낌이었다. 밤새 다큐만 공부해야 하는 기숙학원이랄까.
새벽 3시, 위기의 시작
4편의 연속 상영이 지나가고 새벽 3시가 되자 점차 위기가 다가왔다.
눈은 뜨고 있으나 눈꺼풀의 그램수가 올라가는 듯했고, 앉아만 있다 보니 허리 어깨 무릎 발까지 온몸이 찌뿌둥해졌다. 다른 관객들은 안 졸고 보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깜깜한 데다 뒤쪽에 앉은 탓에 확인이 불가능했다. 남들도 졸고 있으면 마음이라도 편했을 텐데 나만 졸 수 없단 생각에 다큐에 집중하는 데 사력을 다했다.
<Who's Gonna Love me Now?>는 훌륭한 편집과 촬영을 거친 수작이었다. 하지만 주제가 다소 무겁기도 했고 이야기의 고저가 크다기보단 담담하게 흘러갔던 탓에 졸음을 이기기가 쉽지 않았다. 다큐의 내용이 끝까지 다 기억나는 걸 보면 확 잠들진 않았던 것 같지만 게슴츠레한 눈으로 버텨냈던 시간이긴 했다.
새벽 5시, 졸음의 절정
5시부터 상영된 <La Channa>는 최고 관객 평점을 받은 훌륭한 다큐였다. 전설적인 플라맹고 여 댄서를 다룬 이 영화는 그야말로 에너지가 폭발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La Channa>를 관람한 시간대가 새벽 5 시인 관계로 극도로 몰려드는 졸음에 거의 두들겨 맞는 수준이었다. 수없이 고개를 꾸벅이며 전설의 댄서, 'La Channa'의 춤사위를 눈에 담으려 했지만, 중간중간 인터뷰 씬이 나올 때마다 나의 목은 힘을 잃고 고꾸라졌다. 버티다 버티다 못해 에라 모르겠다 하고 팔짱을 끼고 자다가 마지막 부분에 뭔가 엄청난 에너지의 공연 씬 중에 눈을 떴다. 플라맹고 공연의 에너지가 기합소리를 통해 느껴졌지만 각성하지 못한 나의 정신은 영화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것 같다. 끝날 때가 돼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내심 '와 이 다큐 정말 대단한데'라고 생각하면서도 너무 많은 부분을 잠에 넉 아웃돼 놓친 것이 아쉬웠다. 상영 플랫폼을 찾는 대로 꼭 다시 제대로 관람하겠다고 다짐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아침 7시, 부활
<La Channa>의 러닝타임 동안 좀 자서 그런지 7시 마지막 상영작인 <Life, Animated> 때는 정신이 돌아왔다. 기대가 컸던 다큐이기도 하고, 잠을 좀 깬 탓에 그런대로 집중해서 관람할 수 있었다.
애니메이션을 통해 자폐증을 극복해나가는 스토리의 이 다큐는 소재, 촬영, 편집 등 모든 면에서 대단한 작품이다. <La Channa>의 희생으로 얻어낸 체력으로 영혼까지 집중력을 끌어내 열심히 관람했다. 10시간째 같은 자세로 다큐멘터리만 보고 있던 탓에 눈빛은 총기를 잃긴 했지만 그래도 졸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한 것은 성과였다. 아침 7시란 시간대에도 흥미를 유지하고 볼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인 노력도 있지만 이 다큐의 엄청난 스토리와 다채로운 화면의 덕이 크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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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9시, 종료를 알리는 아침 식사
마지막 다큐까지 관람하고 나오니 로비에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테이블에 길게 나열된 샌드위치 도시락들을 보니 꽤 뿌듯했다. 12시간을 버텨낸 관객들은 로비의 스탠딩 테이블에서 제각기 아침 식사를 했다. 다른 곳에서 보지 못한 독특한 영화제 이벤트의 마무리로 아침 도시락은 재밌기도, 의미 있기도 했다.
샌드위치 맛도 꽤 괜찮았다. 물론 비몽사몽인 상황이라 정확한 맛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성취감을 반찬으로 맛있게 먹은 것 같다.
아침 식사까지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환한 날씨가 어색했다. 트램을 타러 렘브란트 광장까지 가는 짧은 거리마저 힘겨웠다. 트램을 타고 앉아서 가는 와중에도 꾸벅꾸벅 졸다가 숙소에 도착했다. 소망하던 침대로 몸을 던질 때 다큐멘터리 마라톤은 두 번은 힘들겠다고 되뇌며 베개와 접촉하는 순간 잠들었다.
다소간의 체력을 요구하는 경험이긴 했지만, 지나고 보면 무척 기억에 남는 이벤트였다. 무엇보다 무려 12시간을 쉬지 않고 다큐를 관람하는 이런 행사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이 곳의 다큐 사랑이 부러웠다. 국내 다큐 영화제에서도 가능할 수 있을까. 아직은 요원해 보이지만 언젠가 다큐멘터리 팬들이 그만큼 군집할 날을 기다려본다.
모든 사진 by 논픽션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