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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에서 내가 싫어지는 순간들

34세, 캐나다에서 다시 시작

by normal B

한 달이 지나 캐나다에 온 지 5주가 되었다. 한 달 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으면서도 뭘 했는지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새로움에서 오는 재미와 설렘 같은 긍정적인 감정만 느낀 건 아니라는 것이다. 긍정적인 감정은 오래가고 부정적인 감정은 빨리 사라지면 좋으련만 실상은 그 반대다. 긍정적인 감정은 오래가지 않지만 부정적인 감정은 오래가서 며칠 동안 나를 괴롭히기도 한다.


한 달 동안 나 자신이 싫어지는 순간들이 몇 번 있었다. 도착한 지 2주 정도 됐을 때, 운동화가 필요해서 혼자 쇼핑몰에 갔다. 매장에서 운동화를 보고 있으니 당연히 점원이 다가와서 말을 거는데 누가 내 입에 풀이라도 칠한 듯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캐나다에 와서 처음으로 자괴감을 느낀 순간이었다. 영어로 인터뷰를 볼 때마다 내 한계를 마주했지만 인터뷰는 한국말로 해도 어려운데 어쩌겠어라는 알량한 자기 연민으로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운동화를 고르고 사는 일 정도는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자괴감과 좌절감을 느꼈다. 그 뒤로 내가 무엇을 원하고 원하지 않는지 같은 기본적인 의사표현조차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무력감과 이 모든 것을 나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외로움이 따라왔다. 자괴감, 좌절감, 무력감 그리고 외로움이 한꺼번에 몰아쳤다.


이런저런 일 이후 결국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해 외국인 친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에 처음으로 어플을 깔아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내 성격이 또 다른 복병이었다. 오은영 박사가 '오은영의 금쪽상담소'에서 친구를 사귀기 어려운 사람들의 특징을 말한 적 있다. 첫째, 먼저 다가가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다. 둘째, 속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셋째, 외로움이 별로 없다. 넷째, 자기만의 신념이 확실하다. 다섯째, 친구라는 개념의 기준이 높다. 나는 언어와 성격이라는 장애물을 넘어 말을 건네는 대신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캐나다에 와서 가장 강한 자괴감을 느낀 순간이었다.


1963년에 개장한 캘거리의 랜드마크 캘거리 타워(Calgary Tower).


이전에 바닷가재가 어떻게 성장하는지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A LIFE-LESSON from A Lobster). 바닷가재는 단단한 껍질 안에서 사는 연하고 흐물흐물한 동물인데, 바닷가재의 단단한 껍질은 늘어나지 않아 바닷가재를 점점 압박하고 불편하게 만든다. 그래서 바닷가재는 포식자로부터 안전한 공간을 찾아 기존 껍질을 버리고 새로운 껍질을 만든다. 만약 바닷가재한테 의사가 있다면 바닷가재는 성장할 수 없을 것이다. 의사한테 가서 약을 처방 받으면 되니까. 인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은 성장할 때가 됐다는 것이며, 우리에게 닥쳐온 역경을 잘 이용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


나는 이제 쇼핑몰에서 자괴감을 느끼지 않는다(다행히 쇼핑몰은 이제 좀 익숙해졌다). 다만, 나를 압박하는 또 다른 단단한 껍질을 갖게 됐다. 나는 언제쯤 이 껍질을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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