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보나 Jan 13. 2021

낯선 이로부터 받은 수상한 택배

수면제의 부작용

나는 요즘 손목이 안 좋아져서 꽤 오랫동안 치료를 받고 있다. 매주 한 번씩 정형외과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고 있는데, 그날도 물리치료를 받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문 앞에 예고 없던 택배가 놓여 있었다.


‘요즘 택배는 미리 연락이 오는데?’


택배를 보자마자 내가 한 생각이었다. 실제로 나는 거의 매일매일 택배 알림 문자를 받고 있었다. 요즘 나의 우울증이 다른 증상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인데, 끝없는 허무함에 미친 듯이 쇼핑을 하거나 무언가를 끊임없이 먹는 증상이었다. 아무튼 분명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뭔가를 산 것이 틀림없을 테고, 나는 주소를 확인한 뒤 택배를 집으로 들고 들어왔다.


아침노을 맨션 302호. 이보나. 010-xxx-xxxx. 분명 우리 집이 맞았고 내 이름이 맞았고 내 전화번호가 맞았다. 그런데 내가 매일 받는 CJ대한통운도 아닌, 롯데 택배도 아닌, 편의점 택배였다. 게다가 보낸 사람은 생전 처음 보는 남자였으며, 나와 같은 시에,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 사는 사람이었다.


누구냐, 넌.


나는 가끔 수면제를 먹고 잘 기억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물건을 사고 다음날 아침에 배송을 받기도 했다. 그런 일은 주로 결제가 간편한 쿠팡에서 일어났다. 때문에 이번에도 혹시 내가 수면제를 먹고 뭔가 산 게 아닐까 곰곰이 되짚어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물품명을 확인했다.


프로작네이션 750g.


프로작? 나는 프로작네이션이 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프로작은 안다. 그건 우울증에 쓰이는 약물 이름이다. 내 주치의는 내가 먹는 약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진 않았지만 나는 언제나 처방전을 읽어보기 때문에 대강의 약물 이름은 외우고 있다. 프로작-네이션이라면 누군가 내게 약을 보낸 것인가? 그것도 750그램이나? 나는 일단 택배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 바들바들 떨며 최대한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가능성 1. 나는 어젯밤에 수면제를 먹고 몽롱한 사이에 당근마켓에 접속해서 수상한 약물을 샀다.

가능성 2. 누군가 나를 미워해서 테러(?)하려고 내게 수상한 약물을 보냈다.


바보 같지만, 우울증이란 원래 바보 같은 생각이 그럴듯하게 느껴지는 병이다. 이걸 열어봐야 할까? 정말 생화학 테러 같은 거면 어쩌지? 열었는데 폭탄이 나오는 거 아냐? 정말 무서운 게 나오면 어쩌지? 경찰에 신고할까? (그 모양도 정말 폭탄 같았다. 정말이다.)


나는 일단 택배를 밀어 두고 밥을 먹기로 했다. 밥을 먹으면 마음이 진정되어 좀 더 머리가 잘 돌아갈 것 같았다. 하지만 밥을 먹고 나서도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고, 두 시간쯤 택배를 앞에 두고 고민하던 나는 결국 그걸 뜯어보기로 했다. (이렇게 결심하기 전에 온갖 쇼핑몰 앱을 다 확인한 건 물론이다. 구매내역은 없었다.) 겉을 감싸고 있는 두꺼운 종이를 북 찢자 ‘kf94 마스크’라는 글자가 보였다.


마스크? 누가 마스크를 여기에? 마스크를 위장한 테러인가? 지금이라도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하고 택배를 열어야 하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나는 kf94 마스크라고 써진 포장지를 한 번 더 찢었다. 그것은....



책이었다.

<프로작네이션>이라는 이름의 책이었다.


그때서야 가물가물 기억이 나는 것 같았다. 나에게 이 책을 추천한 사람은 내 친구이자 작가 지음이었다. 아, 아아...

나는 당장 지음에게 연락을 했다.


-혹시 이거 너가 보냈어?

-응. 내가 그때 보낸다고 했잖아.

-....언제?


지음은 내게 그날 우리가 한 카톡 대화를 캡처해서 보내주었다. 정말로 지음은 내게 <프로작네이션>이라는 우울증 관련 책이 괜찮은 것 같으니 보내겠다고, 다만 절판이니 중고책을 보내겠다고 말했었다. 나는 그걸 까맣게 잊은 것이었다. 심지어 그 캡처 내역을 보는 순간에도 대화가 가물가물하고 생소하게 느껴졌다. 지음과 대화한 시간을 보니 11시 15분이었다. 아마도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몽롱했던 상태였던 것 같다.


우울증은 사소한 일에도 불안해지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죽고 싶어지는 병이다.

나는 이날 실제로 지옥을 겪었다. 생화학 테러라니, 누가 나 같은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그땐 그럴 수 있다고 느껴졌다.

아무튼 이 일은 우울증 환우를 위한 친구의 배려였다는 걸로 훈훈하게 마무리되었지만 나는 이제 내 기억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언제쯤이면 다시 명징한 정신을 갖게 될까. 갈 길이 멀다.

이전 02화 우울증에 완치는 없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