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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도토리 Oct 27. 2022

나 교양있는 남자야

나라카드 상품3팀 윤수진 (7)

1: 간식 창고와 바퀴벌레​​​​​
2: 새벽의 일일실적 보고서​​​​​
3: 회사원이라는 페르소나​​​​​
4: 갈색 벨트를 차고 갈색 구두를 신은 직원들​​​​
5: 특명 수진의 도전!​​​
6: 윤대리, 니가 !​​


화를 가라앉히고 첫 번째 고객 정보를 확인했다. A시 의사협회 카드였다. 우리 파트에서는 분명 가망 고객이 얼마 되지 않을 것 같다며 우려를 표했지만, 팀장의 고집으로 추진한 상품이었다. 의사협회니 분명 카드사용 금액도 클 것이고 계약 과정에서 좋은 인맥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 이유였다. A시 의사협회 담당자와 아는 사이라고 해서 삶의 어느 부분이 개선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지만 어쨌든 카드는 만들어졌다. 컨셉도 목표도 없는 지루한 카드였다. 지루한 카드는 만든 지 3개월 만에 대다수의 고객들이 떠나갔다. 협회 담당자의 예상과는 달리 지역 의사협회 의사들은 협회 이름이 박힌 카드를 사용할 정도로 소속감이 높지는 않았다. 이제 그 카드를 이용하는 고객은 내가 곧 통화하게 될 이 회원 단 한 명뿐이었다. 그때 팀장이 이 카드만 만들지 않았어도 불편한 통화가 세 건에서 두 건으로 줄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성실한 직장인답게 진한 믹스커피를 타 마시면서 화를 눌렀다. 혈관에 카페인과 유지방이 들어오자 기분이 좀 나아지는 착각이 들었다. 통화 중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했다. 화를 낼 경우, 보상을 원할 경우, 기존 카드를 사용하고 싶어 할 경우… 다양한 시나리오대로 내가 할 말을 정리했다. 말발이 약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준비었다. 나름의 원고를 작성하고는 다이얼을 눌렀다.  


“여보세요.”


“네. 고객님. 안녕하세요. 나라 카드입니다. 사용하고 계시는 의사협회 카드 교체 발급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기존에 안내해 드린 대로 저희가 이번에 사용하고 계시는 의사협회 카드가 단종되어 더 좋은 서비스의 카드로 교체해드리고자 연락드렸습니다.”


“아 난 카드 안 바꿉니다. 잘 쓰고 있는 카드를 왜 자꾸 바꾸라 합니까?”


그래 예상한 시나리오였다. 당황하지 말자. 그런 말을 할 줄 알았지. 차분히 고객의 반응에 맞춰 준비한 대응 멘트를 골라 내뱉었다.


“네, 해당 카드보다 더 서비스가 좋은 카드로 바꿔드리는 것이고, 연회비도 대신 내드릴 거라 고객님 입장에서는 오히려 금액적으로는 이익이십니다.”


“얼마나 좋은 카든지 뭔지 나는 그거 필요 없어요. “


역시 강경하게 나오는군. 그럴 수 있지. 잘 쓰는 카드를 바꾸라는 데 이 정도의 불만은 충분히 예측했다고. 이때를 대비해 준비한 강화된 보상 금액이라는 패를 살며시 던졌다.


“저희가 고객님께 5년 치 연회비를 제공해드리려고 합니다. 그렇면 새로운 카드는 유효기간 만료 시까지 연회비 없이 사용하실 수 있게 되는 것이라…”

“그런 거 말고 그쪽 회사에서 주최하는 행사 있지 않나? 클래식 공연이라든지 스포츠 경기라든지 그런 거 말이야. 그런 거 많이 하잖아.”


고객의 말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말이 짧아짐과 동시에 우리의 대화는 내가 작성한 시나리오에서 멀리 벗어나고 있었다. 행사? 클래식? 스포츠? 우선 말을 더 들어보기로 했다.


“네 고객님… “

“앞으로 1년간 모든 행사에 나를 초청하란 말이야. 그렇다면 내가 카드를 바꾸는데 협조할 의향이 있습니다.”


이런 답변은 분명 내 시나리오상에는 없는 내용이었다. 어떡하지? 나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야 했다.


“네. 고객님. 저희가 어떤 행사를 진행할지 계획되어있지 않아서요. 막연하게 저희가 앞으로 있을 행사에 초대해드리는 것보다 보상을 늘려드리는 것이 더 좋으실 수…”


“나는 그런 연회비 몇 푼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야. 참 뭘 모르네. 모든 문화행사에 VIP로 나를 초대하세요.”


이미 시나리오에선 탈선한 지 오래인 이 대화에서 이미 나의 승기는 요원해져 버렸다. 나는 나의 패배를 인정해야만 했다. 강성민원인이 얼마나 강성인지를 과소평가한 나의 잘못이었다. 나는 휴전을 요청했다.


“네. 고객님, 그건 유관부서와 윗선의 승인이 필요할 것 같아서 제가 확인 후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첫번 째 전화부터 예상치 못한 난관이었다. 상대를 과소평가한 나의 완패였다. 기껏해야 나에게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하는 정도의 강성민원을 예상한 순진했던 나의 실수였다. 상상하지 못한 이런 고차원 공격이라니. 나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간 건 통화의 처음 15초 정도가 전부였다. 나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면역이 전혀 없었다. 팀장님한테 어떻게 보고해야할지 머리를 싸매고 한숨을 쉬는 나를 보고 오늘도 한가한 옆자리 선배는 심심했는지 무슨 일인지 물어왔다. 자초지종을 들은 선배는 연민과 어이없음이 뒤섞인 표정으로 한참을 웃더니 또 아무 일도 아니라는 특유의 말투로 툭 하고 말을 던졌다.


“30만 원 아니 딱 20만 원만 현금으로 보상해준다고 해봐.”


“그런데 이분이 의사라 돈은 이미 많으실 것 같고… 그런 금전적인 걸 원하는 게 아니라 문화행사 VIP를 원하신다니까요? 그리고 팀장님이 인당 5만 원까지만 쓰라고 했어요.”


“응. 알겠는데 그러니까 우선 팀장님한테 생각보다 더 강성고객이라 20만원은 써야 할 것 같다고 한번 말해보라니까?“


아니 남은 지금 골치 아파죽겠는데 히죽히죽 웃으며 말하는 선배가 얄미웠다. 저렇게 자신 있어 하는 이가 바로 옆에 있는데 팀장은 왜 애초 나한테 시킨 거란 말인가? 다음에 이런 일이 또 주어지면 적극적으로 선배를 추천하리라 굳게 다짐했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했는데도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 뭐 밑져야 본전이지. 선배의 말대로 해보기로 했다. 사실 그간 선배의 조언 성공률은 꽤나 높은 축이었다. 지난번 대리운전 번호 사건 때도 그렇고 별생각 없이 던지는 것 같은 선배의 조언은 의외로 잘 먹히곤 했다. 얄밉지만 부러운 능력이었다. 5만 원 한도를 고집하던 팀장은 나의 20만 원 통보에 흠칫 놀랐다. 하지만 이내 하얗게 질려 그 고객이 얼마나 강성인지를 설명하는 내 얼굴을 보고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아니면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마지못해 허락해주었다. 물론 나머지 고객한테는 5만 원 한도를 꼭 적용하라는 잔소리는 잊지 않았다.


이제 그와의 두번 째 전쟁 아니 두번 째 전화를 준비해야 했다. 10만 원을 우선 먼저 던져보고 안 먹히면 금액을 올려볼까? 20만 원도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릿속의 실타래 같은 경우의 수를 시나리오를 또 한 번 준비했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총알이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수화기를 들 수는 없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비장한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고객님, 안녕하세요. 나라 카드입니다. 저희가 내부적으로 알아보았는데 문화행사 VIP 초대는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신 불편을 끼쳐 죄송하다는 의미로 20만 원 현금을 제공해드리려고 하는데 어떠실까요?”


“그래요.”



노트 앞뒤로 빽빽하게 시나리오별 대응 방안을 적은 노력이 무색할 정도로 통화는 짧게 끝났다. 이제 내가 할 일은 고객에게 새로운 카드를 발급시키고 고객의 결제 계좌로 20만 원을 쏘아주는 것뿐이었다. 20만 원을 민원 처리용으로 사용하겠다는 품의서를 작성하였다. 지급 사유란에 뭐라 하소연을 잔뜩 털어놓고 싶었지만 물론 고객 불만이라고 건조하게 적을 수밖에 없었다. 결재는 지체없이 이루어졌다. 문화행사 초대해달라는 것은 진심이었을까? 어쩌면 그랬을지 모른다. 엄청난 문화예술 애호가인 그는 어쩌면 보상으로 받은 20만 원으로 클래식 공연을 보러 갈지도 모르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 편이 나에게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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