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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도토리 Oct 30. 2022

내 이름은 윤수진

나라카드 상품3팀 윤수진 (8)

1화: 간식 창고와 바퀴벌레​​
2화: 새벽의 일일실적 보고서
3화: 회사원이라는 페르소나
4화: 갈색 벨트를 차고 갈색 구두를 신은 직원들
5화: 특명 수진의 도전​!
6화: 윤대리, 니가 해
7화: 나 교양있는 남자야


다음날 출근 후 두 번째 고객에게 연락할 준비를 했다. 하려면야 어제 고객과의 통화 이후 바로 두 번째 통화까지 진행할 수 있었겠지만 어쩐지 수화기가 무겁게 느껴져 선뜻 전화기 버튼에 손이 가지 않았다. 전화하기 싫은 것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맡고 있던 월말 보고서의 마감이 어제까지였기 때문에 전화하기에는 조금 빠듯한 것도 사실이었다. 두 시간이면 끝날 보고서를 괜히 질질 끌며 천천히 마무리하고는 무거운 마음으로 퇴근했다. 밤사이에 남은 두 개의 민원이 철회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희망을 담은 상상을 해보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남들은 로또가 되는 상상을 한다는데 나의 상상은 상상 속에서도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이번 고객이 사용하는 카드는 중소형 증권사 제휴카드였다. 내가 오기 전에 만들어져 히스토리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그동안 서비스오류나 큰 민원 없이 얌전히 존재하던 카드였다. 의사협회 카드처럼 단 한 명의 회원이 남아있는 그런 카드는 아니었지만 역시 열 명 남짓의 사람들만이 카드하고 있던 터였다. 이번 통화할 이는 그 열 명 남짓 되는 사람 중 유일하게 카드 교체를 거부한 고객이었다.


“안녕하세요. 나라카드입니다.”


“누구시죠?”


“네. 나라카드 교체 카드 담당자입니다.”


“나라카드 누구냐구요? 김순지 맞아요? 김순지 아닌 것 같은데요?”


“김순지 씨요?”


“나는 김순지라는 사람이 전담하는데 당신은 누굽니까?”


하, 이번엔 초장부터 시나리오 이탈이었다. 김순지? 전담 상담원을 운운하는 것 보니 두 번째 통화 역시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는 확신이 들었다. 시나리오별 대응을 적은 노트는 저 멀리 치워버렸다. 도대체 이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해서 나를 놀라게 할 것인지 우선 들어나 보기로 했다. 다시 목을 가다듬고 쉽게 올라가지 않는 솔음으로 목소리를 겨우 맞추었다.


“네. 고객님, 김순지님과 나라카드 교체 관련해서 통화를 하신건가요?”


“네. 김순지요. 김순지. 분명히 김순지가 다시 전화해준다고 했는데 그쪽은 누구요?”


“저는 새로운 교체 카드 담당자입니다. 이번에 불편을 드린 것 같아 본사에서 직접 처리해드리고자 연락드렸습니다.”


“아니요. 김순지한테 연락하라고 하세요. 김순지랑만 이야기할 거니까.”



이번에도 뚝 하고 끊겨버린 전화였다. 나만 모르게 모든 사람들이 앞으로 전화를 뚝 끊자고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일까? 뚝 끊긴 통화는 그렇다 치고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욕을 하는 평범한 진상 고객들이 오히려 인간적으로 느껴질 것 같았다. 이 사람은 누구고 김순지라는 사람과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센터에서 다시 전화하기로 했는데 누락된 것은 아니었는지 혹시 상담원과 별도의 협의가 있었는데 전달받지 못한 것인지에 대한 추가 확인이 필요해 보였다. 우선 김순지 상담원이 실재하는 인물인지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전산에서 인사 정보를 검색했다.


카드아웃바운드 A센터 김순지 사원


고객센터에 정말 김순지라는 직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흔한 이름은 아니니 그 고객이 말한 이가 이 상담원이 맞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정을 하기로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내부 메신저로 김순지 상담원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 상품 3팀 윤수진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 제휴카드 교체관련해서 고객님과 통화를 했는데요. 순지님을 자꾸 찾으셔서요. 혹시 상담하면서 별도 이슈가 있었는데 제가 전달받지 못한 건가 궁금해서 연락드렸습니다.


김순지 상담원은 짧고 건조하게 인사말을 남기더니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처음에는 일반적인 민원과 동일했다고 한다. 카드 교체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고 설득을 위해 통화가 길어지고 추가적인 통화도 두 세건 오갔다. 본인의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것 뿐이었던 김순지 상담원과의 통화가 편하게 느껴졌는지 이 고객은 점차 본인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가 한때는 어떤 사람이었는지와 같은 조금도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들. 카드와는 상관없는 그런 이야기가 이어졌다. 혼자 살고 옛날에 사업을 크게 했고 지금도 어디 어디에 땅이 다 본인꺼라는 이야기가 일방적으로 쏟아졌다. 어떻게든 상담을 마무리하기 위해 김순지 상담원은 새로 발급할 카드 이야기를 몇번이나 꺼내며 주의를 환기해야했다. 그때마다 고객은 이야기를 듣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자연스럽게 본인의 이야기로 다시 넘어갔다. 선은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으면서도 누구도 듣고 싶지 않은 본인의 사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고 했다. 결국 카드 교체는 실패했고 고객은 나에게 넘겨졌다. 미처리 사유에는 강성 민원이라 단순하게 적혀졌다.


‘직접 통화하실 줄 알았다면 사유를 좀 더 자세히 쓸 걸 그랬나 봐요…’


‘아니에요… 세상에 별별 사람이 다 있네요.’


메신져에는 ‘작성 중’ 표시가 생겼다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한참 뒤에 화면에는 짧은 한 줄이 적혀있었다.


‘그런 사람 많아요…’


메신져 속 썼다 지우기를 반복한 그 한마디에서 나는 그녀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초보라는 점을 감안해 관대하게 평가하더라도 나는 단 두 통의 전화만으로 녹다운이 되었다. 분명 고객센터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매일 아니 매시간 새로이 등장할 것이다. 이러한 일에 이골이 날 정도로 정통한 인력일지라도 반복되는 다채로운 진상의 등장은 그들의 마음을 다치게 할 것 같아 보였다. 동시에 그들의 업무에 대해 안쓰러움을 느끼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자기 검열 역시 시작되었다. 아무리 상품 3팀의 업무가 더럽고 하찮아도 누군가가 안타까워한다면 그건 그 나름대로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좋을지 말을 고르던 차에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다시 센터로 이관해 주시면 저희 쪽에서 처리하겠습니다.’


메신져 속 말투는 다시 간결하고 건조한 원래의 말투로 변해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한숨을 읽어버린 나는 두 번째 민원인을 그녀에게 다시 넘기고 싶지 않았다.


아니에요. 제가 한 번 더 해결해보고 말씀드릴게요.


메신져 대화를 마치고 나는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처음만큼 주눅이 들지는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요청하신 김순지 상담원과의 통화는 불가합니다. 저희가 드릴 수 있는 최종 제안은 연회비 5만 원 제공인데 교체 진행해 드릴까요?”


그쪽 이름이 뭡니까?


제 이름은 윤수진 입니다.


“수진씨. 내가 그 전 아가씨랑 통화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내가 왜 카드를 안 바꾸냐 하면 내가 사업을 크게 하던 사람인데 말이야…”


“네, 고객님. 지금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카드가 단종될 것이고 대체 카드 발급이 필요하시다는 것입니다. 저희는 새로운 카드의 5년간의 연회비를 제공해 드릴 수 있고 이 조건이 받아 들이기 어려우시다면 말씀해주세요. 제가 지금 드릴 수 있는 조건은 이게 최선이라 받아 들이기 어려우시면 윗선에 올려서 다른 해결책을 받아오겠습니다.”


 “그쪽 마음대로 바꾸는 거면서 뭐 태도가 그런가 참... 이래서 내가 김순지랑 이야기한다고 한 건데…  그냥 바꿔줘요 그럼.”


네. 감사합니다. 나라카드였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전문 상담원처럼 친절하거나 따뜻하지 않은 나의 말투에 사뭇 놀랐는지 민원인 2는 생각보다 쉽게 물러나 주었다. 2명의 고객과 진행한 총 4번의 통화 중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끝낸 대화였다. 확실하고 구체적인 행복이 몰려왔다. 김순지 상담원이 생각났다. 그녀에게 이 소소한 승리를 전달하고 싶었다. 우리 둘이 이뤄낸 공동의 승리같이 느껴졌다. 메신져를 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또 다른 종류의 강성 고객을 대하느라 바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디 그녀의 남은 오늘이 무리 없이 진행되기를 바라며 두 번째 고객 처리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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