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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도토리 Oct 30. 2022

두 여자

나라카드 상품3팀 윤수진 (9)

1화: 간식 창고와 바퀴벌레​​​
2화: 새벽의 일일실적 보고서​
3화: 회사원이라는 페르소나​​
4화: 갈색 벨트를 차고 갈색 구두를 신은 직원들​
5화: 특명 수진의 도전​!
6화: 윤대리, 니가 해​
7화: 나 교양있는 남자야​
8화: 내이름은 윤수진


마지막 고객 한 명만이 남았다. 이 카드만 없애면 나는 드디어 이번 업무에서 벗어나 평소와 다름없이 새벽부터 일일 실적이나 보내는 별일 없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토록 싫어했던 그 업무지만 지금은 그 평범했던 일상이 그립기까지 했다. 방금 전의 전화까지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니 괜스레 힘이 솟았다. 이 기세를 몰아 마지막 통화까지 단번에 끝내버리리라 마음먹었다. 공교롭게도 마지막으로 처리할 카드는 나의 첫 출시 카드이기도 한 태성마트 카드였다. 그래 생각보다 괜찮은 마무리다. 영화로 치자면 꽤 멋진 수미쌍관적 마무리가 될 것 같았다. 내가 만든 카드를 마지막까지 써주는 단 한 명, 누군지 모를 이별을 부인하고자 하는 그에게 나는 냉정한 애인처럼 이별을 재차 통보해야 하는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나라카드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네. 태성마트 카드 교체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셔서 제가 연락드렸어요.”


“바꾸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나는 참 잘 쓰고 있는 카드라서… 가능하면 계속 사용하고 싶습니다.”


앞선 두 통화 속의 목소리보다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강성 민원이 맞긴 한건가? 조금 더 강하게 푸시하면 금방 카드 교체에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지는 멀지 않아 보였다. 새로운 카드의 혜택을 강조해보는 거다. 이번엔 한 번에 성공해보자고.


“그러시군요. 그런데 저희가 새로 발급해드릴 카드는 서비스도 기존 카드 대비해서 훨씬 좋으시고요. 저희가 연회비도 카드 사용하시는 동안은 청구하지 않을 예정이라 무료로 더 좋은 카드를 사용하시는 거라고 보시면 되세요. 특히 새로 발급해 드릴 카드는 기존 태성마트 카드 대비해서 마트 전 영역에서 할인이 되시기 때문에 바꾸시는 게 무조건 이익이라고 보실 수 있어요.”


어느새 카드에도 극존칭을 써버리고 있는 나였다. 이 정도면 새로운 카드로 바꾸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논리정연한 나의 멘트에 나조차 취할 뻔한 것을 겨우 붙잡아 정신을 차렸다.


“네. 그런데 저는 태성마트만 가서요. 다른 마트 할인은 필요가 없어요.”


네네. 그런데 모든 마트 할인이 되기 때문에 태성마트도 당연히 할인 대상에 포함이 됩니다. 지금처럼 할인을 받으실 수 있으세요. 가끔가다 다른 마트에 가신다면 그것 역시 추가로 할인이 되시기 때문에 전혀 손해는 아니세요.


“네… 그렇지요. 그렇게 설명을 하시더라고요. 그냥 그래도 쓰던 카드를 쓰면 안 될까요?”


앞선 두 고객과는 다르게 목소리에서 강성민원인의 냄새를 느낄 수는 없었으나 그 태도만큼은 강경했다. 좋아진 카드 혜택에도 연회비 제공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목소리었다. 화를 내지도 않았고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카드를 조금 더 쓰고 싶다는 주장만이 계속됐다. 이유가 궁금해졌다. 카드를 바꾸는 것이 물론 번거롭고 수고스러운 일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귀한 시간을 카드사 직원과의 지리한 통화로 낭비하면서까지 카드 유지를 고집해야 할 이유는 잘 생각나지 않았다. 뭔가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어 보였다.


“혹시 변경이 어려운 다른 이유가 있으실까요?”


변경이 어렵다기보다는…이게 우리 딸이 신청하라고 해서 만든 카드거든요.


삼전 삼패다. 이번에도 역시 예상하지 못한 답이었다. 앞의 두 통화가 예상하지 못한 화를 가져다주었다면 이번에는 예상하지 못한 궁금함이 생겼다는 점에서는 조금 달랐다. 딸이 신청하라고 했다고? 이 카드를 홍보하고 다니는 젊은 여성이 나 말고도 있었단 말인가?


“따님이요? 따님이 나라 카드 다니시나요?”


“그게 아니고. 우리 딸이 태성마트 본사에서 일했거든요. 처음 입사해서 카드사랑 뭐 해서 카드가 나왔다고 자랑하면서 실적 올려달라고 해서 만들었지요. 작년에 결혼해서 미국에 갔는데 그냥 마음대로 카드를 바꾸는게 좀 그러네요. 바꾸더라도 바꾼다고 말을 하고 바꾸고 싶은데 요새 애기 키우느라 바쁘다고 해서 연락을 못 해가지고 참. 뭐 이제는 신경도 안 쓸지 모르겠지만 마음에 좀 그래요… 조금 더 쓰고 싶어서 안 바꾸겠다고 했지요…”


 태성마트와의 첫 미팅이 생각났다. 입사 후 처음 참석하는 제휴사 미팅이라 잔뜩 긴장했었다. 면접 때 입었던 정장을 입고 A시로 가는 택시를 탔다. 명함을 지갑에 소중히 넣었다. 입사 후 두통이나 만든 명함이지만 생각보다 쓸 일이 없었다. 쓸 일이 없다보니 식당의 명함 추첨 이벤트 박스가 보일 때마다 명함을 잔뜩 넣었다. 한 번도 당첨된 적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명함을 제대로 써보겠구나 싶었다. 명함을 주고받는 법도 인터넷에 검색해보았다. 사회에 나와보니 새로이 익혀야 할 규칙이 너무나 많았다. 마트 측에서는 총 세 명이 미팅에 참석했다. 이제 생각해보니 맨 끝자리에 앉아있던 사원이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도 같았다. 꺼내 놓은 세 장의 명함을 소중히 꺼내 한 장씩 건넸다. 상대편 부장과 과장도 명함을 건네 주었다. 끝자리의 막내 사원이 명함을 미처 챙기지 못해 민망해하자 마트측 부장이 지나가는 말로 한소리 했던 것도 생각이 났다. 생각이란 것은 참 신기하다. 조금 전까지는 까맣게 잊고있었는데 머리에 불이 켜지니 그때 그 장소의 소음과 냄새까지도 기억이 나는 것 같다. 초록색 부직포 위에 유리가 깔린 테이블, 오래된 가죽 소파 냄새, 간간히 들렸던 정수기 물 내려가는 소리… 나는 거기에 있던 그 막내 사원의 어머니와 통화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날 계약은 원활히 진행되었다. 몇 달 후 내 손으로 처음 만든 카드를 손에 넣고 설렘에 가득차 태성마트로 몰래 답사를 나갔던 것이었다. 그즈음 그녀도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새로 만든 카드를 자랑하며 빨리 하나 만들어 달라고 재촉을 했던 것 같았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우리 둘은 우리가 만든 성과가 신기하고 소중했었던 것 같다. 나는 시외버스를 타고 A시로 향했고 그녀는 가족에게 태성마트 제휴카드를 자랑했다.


이제 태성마트 카드를 사용하는 사람은 수화기 너머의 저 한 명뿐이었다. 출시 초반에는 장바구니 증정 이벤트와 추가 할인 프로모션으로 열심히 회원을 끌어모았었다. 피크 때에는 전체 회원 2만 명 정도를 기록하기도 했었다. 일일 실적표에 늘어가는 태성마트 카드 실적 숫자가 기뻤다. 하지만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일 년쯤 뒤 태성마트 가장 큰 지점 옆에 홈플러스가 들어왔다. 오랜 기간 태성마트를 매일같이 드나들던 사람들도 하나둘 떠나갔다. 2만 명에 이르던 회원 수는 점차 감소하기 시작했고 팀장님은 원인을 찾아서 보고하길 원했다. 근처 대형마트 입점이라는 명백한 이유를 말하니 팀장님도 딱히 더 할 말이 없었는지 그대로 보고는 종료되었다. 카드 이용자 수도 하나둘 줄어들어 최근에는 몇십 명 정도가 근근이 카드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몇십 명 중 지금 나와 통화 중인 그녀의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모두 대체 카드 발급에 동의했다.


“혹시 조금만 더 사용하면 안 될까요? 우습게도 카드에 정이 들었나 이거 참…”


마트를 벗어나 미국으로 갔다는 딸의 안부가 궁금했다. 열심히 하던 직원이었으니 낯선 땅에서도 자리를 잡고 잘 지낼 것 같았다. 나는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 그녀의 행복을 빌었다. 동시에 내 입에서는 시나리오에는 없던 나조차도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네, 제가 지금 사용하시는 카드 유지하실 수 있도록 해볼게요. 그런데 유효기간이 지나면 재발급은 어려우실 것 같아요. 그 정도도 괜찮으실까요?”


“어휴. 그러면 나야 좋죠.”


“네. 고객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이렇게 세 명의 고객과 함께한 다섯 통의 통화가 모두 끝났다.


계속 카드를 쓰게 해놓겠다며 말은 해놓았지만 딱히 마땅한 수는 없어 보였다. 문득 오래된 기억이 생각나 서랍을 열었다.  아래칸을 열어 한참을 뒤적이니 예전에 발급받았던, 해지한  한참  태성마트 카드가 나왔다. 바짝 긴장했던 나의 신입 시절이 묻어있는  같았다. 소심했던 신입사원 윤수진은 미래의 내가 이런 식으로 대책 없이 일을 저지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뱉어 놓은 말이 있으니 카드는 그냥 삭제된 것으로 보고하기로 했다. 옛날 옛적 일일 실적 보고서 구석에 ‘하기 싫다라는 말을  이후에 오랜만에 저지른 반항이었다. 내가 만든 카드를 단종시키라는 지시를 거역한 것이 마치 사살 명령이 떨어진 소년병을 다락방에 숨겨준 기분처럼 느껴졌다. 그래. 우리 팀의 카드 요양원에 어떠한 카드가 있는지는 오직 나만이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구태여 내가 보고한 내용을 검증하기 위해 전산을 뒤져볼 사람도 데이터를 내려볼 사람도 없다. 이제  한장만이 남아있는 태성카드가 조용히 유효기간을 맞이할  있도록 나는 카드를 다락방에 숨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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