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만은 세상에서 제일 우아한 나, 발레

그냥 하고 싶은 마음만으로 괜찮아.

by NYNO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깊은 곳에 숨어있는 욕망 같은 게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끌리고, 하고 싶다고 느끼는 것.
나에겐 그중 하나가 ‘발레’였다.


몸을 잘 쓰며 살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럼에도 춤을 잘 추고 싶다거나, 발레리나에 대한 동경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발레’라는 단어가 나의 버킷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글쎄, 아마 잔잔한 음악 속에서 하늘하늘하게 몸을 움직이며 감정을 표현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자유로워 보였던 것 같다.


마침 새로운 운동을 고민하던 때 성인 발레 붐이 찾아왔고, 회사 근처에 발레 학원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뭔가 알듯 모를 듯한 이유들에 이끌려 발레 학원에 등록했다. 필라테스 센터에서 경험했던 '발레핏' 같은 운동은 내겐 어딘가 부족했다. 나는 정말 예술로서의 발레를 배우고 싶었다. 발레 공연 한 편 제대로 본 적 없었으면서 말이다.




도전할 이유는 충분했지만, 솔직히 두려움도 만만치 않았다.
‘발레’ 하면 딱 벌어진 턴아웃과 쫙 찢어지는 다리의 유연성이 떠올랐는데, 내게 그런 유연성이 있을 리 없었다. 필라테스를 몇 년 하면서 각목 같던 몸이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다리 찢기는 엄두도 나지 않았다. 발레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다리 찢기의 고통’이 두려웠다.


그리고 첫 수업부터 그 고통은 현실이 되었다.

첫 20분 매트 수업부터 다리를 펴고 앉아 온갖 스트레칭을 하며 온몸을 풀었는데, 매일매일 온몸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다리를 곧게 펴고 앉는 L자 자세만으로도 등에 땀이 흐를 정도였다. 아랫등이 둥글게 굽어 있어서 허리를 펴고 앉는 게 너무나 힘들었다. 발레는 상상 이상으로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몇 달간은 사실 춤으로 보일 만한 움직임을 거의 하지 못했다. 발레로 춤을 추려면 너무나 많은 기본기를 익혀야 했으니까. 발의 포지션, 플리에와 파세 같은 기본자세, 간단한 스텝과 점프까지… 성인 취미반이라고 해서 대충 배우는 건 없었다. 선생님은 팔의 각도, 손끝의 모양까지 허투루 넘어가지 않았고, 나는 그런 작은 동작들조차 잘 따라 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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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건 그 작은 동작들과의 씨름 자체가 재밌었다는 거다. 아무리 사소한 동작이라도 늘 음악에 맞춰 우아함을 갖추려 노력했고, 열심히 집중하며 선생님을 따라 한 동작씩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시간은 훌쩍 지나 있었다.


발레가 주는 만족감은 분명했다.
발레복을 입고 서있는 거울 속 내 모습은 평소보다 우아하고 조금 더 여려 보였다.

무엇보다 클래식 음악과 함께 몸을 움직이는 순간의 몰입감이 짜릿했다. 수업 때 흘러나오는 피아노 선율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어느 순간부터는 일상에서도 발레 클래스 음악을 자주 들었다. 차분하고 감미로운 음악에 몸을 맡기고 동작에 몰입하는 그 순간만큼은, 몸치에 가깝던 나도 제법 아름답게 느껴졌다.


발레의 특별함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차분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음악과 동작, 그리고 내 몸이 하나가 되는 몰입. 마음까지 고요해지고 하루 동안 쌓인 짜증과 화도 스르르 녹아내렸다. 수업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개운했고, 나도 모르게 발레 음악을 흥얼거리며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발레를 배우고 나서야 발레 공연도 즐기게 됐다.
대사 없이 조용히 흘러가는 공연이 지루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오히려 더 많은 것이 보였다.

무대 위 발레리나의 손끝, 표정, 몸짓 하나하나에 숨겨진 노력과 디테일이 느껴졌다. 그렇게 운동이 아닌 예술로서의 발레가 나에게 또 다른 세계를 열어주었다. 뻣뻣한 몸으로도, 그동안 숨어있던 욕망 하나로 다시 한번, 내 삶의 폭을 조금 더 넓힐 수 있었다는 사실이 스스로 신기하고 놀라웠다.




발레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이유를 명확히 몰라도, 엄청 잘하지 못해도, 그냥 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무작정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걸.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작은 끌림이 삶을 이만큼 풍성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걸 말이다.


모호한 끌림의 끝에는 항상 새로운 나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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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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