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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번 더 안아주기 Aug 02. 2022

08 화가 장착되지 않은 친구 Y

그녀의 평온함을 닮고 싶다

나의 대학 동기 Y와 그녀의 딸 J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그동안 격리에 대한 부담과 직장, 학교 등의 이유로 가족이나 친구들의 방문이 쉽지 않았었는데, 드디어 한국으로부터의 첫 게스트가 싱가포르 우리 집에 오게 되는 것이다. 며칠 전부터 친구와 나,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까지 총 5명의 여행 일정을 짜고 예매까지 완료하고 나니 이제 드디어 오는 건가 싶어 마음이 설레었다. 


D-day. 현관문을 열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환영의 메시지를 붙이고 welcome drink를 만들었다. 공항에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은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 연락이 왜 없을까 궁금해하던 중에 메시지 도착했는데... Oh my god!

나 가방 못 찾았어. 분실 신고 중.


여행에서 여행 가방은 보물창고다. 며칠 동안 필요한 모든 것들이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여행 가방이 없어지면 금액 가치를 떠나 불편함이 상당하기에 행여 싱가포르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기분을 망쳐버린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Y를 만나기 전까지는. 


도착 5분 전이라는 연락을 받고 1층으로 마중을 갔다. 곧 택시 한 대가 들어오고, 그들이 활짝 웃으면서 내렸다. 내 친구 Y 뿐만 아니라 그의 딸 J에게서도 짜증이나 화는 1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보니 그제야 나도 마음이 편해졌다. 돌이켜 보면, 오히려 가방이 없어진 덕분에 내 옷과 수영복을 입고 어색해하는 친구를 보며 다 같이 하하호호 더 많이 웃을 수 있었구나 싶다.


싱가포르에 머무는 시간 동안 Y는 우리 집, 콘도에 있는 수영장, 그리고 특히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커피와 맥주를 한 잔 할 수 있는 테라스를 좋아해 주었다. "여기 완전 천국이야. 더 있다 가고 싶어."라며 남편과 통화를 했다는 얘기를 들으니 내가 싱가포르에 살고 있음이 참 감사하게 느껴졌다. 


Y가 도착하고 이틀 째 되던 날, 나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Y이모랑 J가 오니 어떠냐고. 


좋아. Y 이모는 참 평온한 사람인 것 같아.


아이들의 눈이 정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하루 만에 그게 보였구나 싶어 놀랐다. 실은 나도 그녀의 another level of 평온함을 감지하고 유심히 살펴보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대학 때부터 그랬지만 Y는 항상 여유가 있다. 10년만에 다시 찾아간 인도음식점에서 다소 실망스러운 fish head curry를 내어놓아도 prawn curry를 맛있게 먹으며 행복해 했고, 맥리치 저수지에서 만난 원숭이가 물병을 가져가려고 해도 아기다루듯 타이르면서 웃으면서 지나간다. 끊임 없이 수영장에 가자는 아이들의 성화에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함께 나가 장난을 치면서 놀아주고, 환불이 안되는 줄 모르고 너무 많이 사버린 기념품 앞에서도 "에고~ 욕심을 너무 많이 부렸네~"하고 돌아서면 그만이다.


최근, 특히 일은 끊이지 않고 아직 엄마손이 필요한 두 아이는 나만 바라보고 있는 걸 느낄 때면 나도 모르게 신경이 예민해져서 아이들을 너그럽게 대하기 어려워질 때가 있었다. 얼마 전 종영한 <나의 해방일지>를 보면서 내 가족을 추앙해 보겠다 다짐 다짐을 했지만, '현실에서 과연 이것이 가능한가?' 하던 딱 그 시점이었다. 그때 그녀가 내게 온 것이다. 


Y의 평온함을 닮고 싶다. 자극과 반응 사이의 간극이 있고, 그 안에는 나의 자유와 선택이 있다는 말이 있다. 결국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나의 자유 의지라는 뜻이다. 어떤 자극이 오든 조금 더 평온하고 따뜻하게 반응하고 싶을 때마다 나의 친구 Y를 떠올려야겠다. 고마워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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