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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번 더 안아주기 Jun 12. 2022

06 하루 5분 셀렘 채우기

Feat. 나의 해방일지

한 동안 푹 빠져 지냈던 박해영 작가의 <나의 해방일지>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구씨: 야. 인생이 이래. 아, 좋다 싶으면 바로... 하루도 온전히 좋은 적이 없다.

미정: 하루에 5분. 5분만 숨통 트여도 살 만하잖아. 편의점에 갔을 때 내가 문을 열어 주면 '고맙습니다'하는 학생 때문에 7초 설레고, 아침에 눈떴을 때 '아, 오늘 토요일이지?' 10초 설레고. 그렇게 하루 5분만 채워요. 그게 내가 죽지 않고 사는 법.

구씨: 응. 넌 여전히 한 발 한 발 어렵게 어렵게 가는구나. 가보자! 한 발 한 발 어렵게 어렵게.




한 동안 애플워치가 고장이었다. 갑자기 시계 표면이 붕 뜨더니 화면이 흐려지기 시작했는데 어디서 A/S를 받아야 할지 몰라 한 두 달 그냥 시계 없이 지냈다. 핸드폰이 있으니 크게 생각보다 불편하지는 않았는데 언젠가 고쳐야 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사고 싶은 Watch Strap이 생겨서 오차드에 있는 애플 매장에 갔다. 

내 시계를 보더니 배터리가 오래 사용하다 보면 부푸는 현상이 가끔 나타난다고, 사용자의 잘못이 아니니 보증기간이면 애플이, 기간이 지났으면 사용자가 비용 부담을 해야 하지만 고칠 수는 있다고 하면서 직원이 system에 내 애플워치의 serial number를 입력했다. 

"손님, 어떡하죠? 이 모델은 Apple Watch 1 빈티지 모델로 분류되는데요, 구매하신 게 2016년이라 부품이 없는 걸로 나옵니다. 새 모델을 고려해 보실 생각은 없으세요?"

2시간을 기다렸다 들은 대답이 고칠 수 없다는 내용이라 힘이 쭉 빠졌다. 그리고, 약간 서글퍼졌다. 그동안 애플워치를 사용함에 있어 1도 불편하지 않았고 그래서 새로운 모델을 굳이 찾아볼 필요는 없었지만 내 시계가 빈티지 모델로 분류되어 있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있었다는 게 약간 서글프고 웃긴 그런 느낌? 그래 이 참에 하나 다시 사자! 집에 오자마자 새로운 모델 2-3개를 놓고 사양 비교를 했다. 배송지 주소를 누르고, 주문 완료! 마지막으로 갖고 싶었던 Watch Strap까지 주문하고 나니 어린아이처럼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딩동! 드디어 애플워치가 도착했다. 뽀얀 Apple 상자와 그 안에 있는 말끔한 나의 새 애플워치를 보는 순간, 7초 설렜다. 





여권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이들 방학 중에는 한국에 갈 일이 있으니 그 때 갱신을 할까 싶기도 했는데 그 사이 출장이라도 생기면 번거로워질 것 같아 주 싱가포르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여권 갱신 신청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사진이었다. 퇴근길에 회사 근처에 있는 Fotohub에 가서 증명사진을 찍었는데.. Oh my god! 소매치기하다가 감옥에 간 멕시코 사람처럼 나왔다. 이걸 앞으로 10년은 써야 하는 새 여권에 넣을 생각을 하니 이건 아니다 싶어 온 집안을 뒤져 예전에 찍어 둔 증명사진을 3개 찾아냈다. 하나는 15년 전 사진이라 내가 봐도 지금의 나와 차이가 크고, 다른 하나는 살짝 색깔 있는 잉크가 묻어 있고, 나머지 하나는 그나마 도전해 볼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귀가 머리카락에 가려져 완전히 보이지가 않았다. 과연 통과할 수 있을까?


대사관은 지난번 부재자 투표할 때 이후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 왔을 때도 그랬지만 대사관을 가면 기분이 약간 이상하다. 초능력을 발휘해 싱가포르에서 한국으로 순간이동(teleportation)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여권 Visa 발급은 12층. 직원 2-3명을 제외하면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청서를 쓰면서 계속 고민했다. 

'아.. 어떡하지? 어떤 사진으로 제출하지? Reject 당하더라도 예전 사진을 한번 내볼까? 여권 사진 잘 나왔다고 어디 자랑할 것도 아닌데 그냥 어제 찍은 걸로 낼까?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


마음의 결정을 했다. Reject 당할 때 당하더라도 예전 사진으로 도전해 보기로. 두구두구두구.. 

"크기가 살짝 작은 사진을 가져오셨네요. 일단 스캔을 한번 해보고 될지 안 될지 말씀드릴게요."

다행이다. 귀 때문이 아니라 사진 크기 때문에 안될 수도 있다고 하니 희망이 보였다. 


"괜찮을 것 같아요. 다음 주 금요일에 찾으러 오세요." 역시 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법이다. 

'Yeah!!!  멕시코 소매치기범 같은 사진으로 매번 immigration에서 이상한 눈초리 안 받아도 된다!' 하면서 5초. 또 한 번 설렘이 충전되었다. 




최근 소확행이다 뭐다 하면서 살면서 느낄 수 있는 작은 행복이 화두였지만,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건지는 여전히 모호했다. 마치 연애를 책으로 배운 느낌이었다고 할까? 그런데 이제는 알 것도 같다. 


하루 5분 셀렘 채우기. 

오늘처럼 그렇게 7초, 5초 채우다 보면 조금 더 행복하게 어렵지만 한 발 한 발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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