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회사생활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의지할 곳 하나 없이 개미같이 죽도록 일만 하던 시절이 있었다. 주어진 일만 해도 늘 시간이 부족했고 나를 둘러싼 관계는 나에게 하나같이 모질었다.
믿을 만한 사람의 추천으로 괜찮은 회사라는 얘길 들으며 이직을 했었다. 입사한 첫 주 부터 힘들게 야근하며 일을 시작하게 될 줄은 몰랐었다. 일에 대한 보람도 크고 재미도 있었기에 나는 열심히 일했지만, 개미같이 일하던 나에게 돌아오는 건 늘어나는 약봉지와 다크써클, 한숨이었다. 한 달 동안 쓴 내 식비보다 야근으로 생긴 택시비(강남에서 잠실까지)가 더 많이 나오기 시작할 때부터 나는 사직서를 품고 다녔다. 동료들과의 시시콜콜한 농담조차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즐겁게 일한다’는 건 사치였고 나에겐 해당사항이 없는 말이었다.
연말에 올해의 직원으로 뽑혀 금일봉을 받았지만 따뜻한 봄이 되자마자 그만두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프리랜서로 일하게 되었다. 고작 대리 명함을 가지고 일하던 나였지만, 지금껏 미친 듯이 해 왔던 경험을 바탕으로 주어진 일을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충만했었다. 잘 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점점 힘에 부쳤다. 회사 울타리가 없이 불안정한 수입과 새로 맺는 사람들의 관계도 내가 감당하기엔 내 그릇이 작아보였다. 프리랜서로 일을 이어가자니 아직은 나에게 적당한 때가 오지 않은 듯 했다. 회사에 들어가서 일하자니 생각만 해도 고개가 절래절래, 곧 어두워진 나를 발견했다. 앞으로 어떻게 일할지 답답했다. 앞날이 깜깜해서 전공도 바꿔버리고 싶었다. 그때 협업하며 일하던 회사에서 입사제의가 들어왔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매일같이 느끼던 때에, 면접을 보고 입사하겠다고 덜컥 결정해버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결정해 버린 건지 아직도 물음표다.
우리 팀은 나와 팀장님, 막내 사원까지 셋으로 이뤄져 있다. 출근해서 각자 간단히 정리하고 다이어리 가지고 모였다. 아침부터 들이닥치는 전화와 함께 둥둥 떠다니는 일을 잠시 제쳐두고 매일 짧게라도 회의를 한다. 스케줄 정리부터 하고 난 다음 각자의 자리에서 일을 시작한다.
사람은 셋이지만 이렇게 많은 프로젝트를 해낸 것은 처음이었다. 사무실일과 현장외근이 많았음에도 손발 잘 맞추어 해낼 수 있었던 것도 신기했었다. 이 곳 우리 팀 안에서 일하며 나에게 가장 중요한 행사였던 결혼준비도 차근차근하고 마음 편히 할 수 있었다. 그게 가장 중요했다. 과거에 만났던 회사 선배들을 보며 나는 결혼 준비나 제대로 할 시간 여유가 있을까? 매일 일에 치여 사는 건 아닐까? 걱정하며 살았었다. 하지만 팀장님을 만나면서 달라졌다.
일이 쏟아지고 꽉 막혀서 더 나가야 할 방법을 몰라 주저하고 있을 때 회의를 하고 나면 속 시원히 풀리고 다음 길이 보였다. 현장 감리를 잘 못하거나 사람 관계 속에 허우적대고 있을 때 팀장님에게 조언을 구하고 나면, 한껏 자신감이 생겨 다시 일터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여태 일하면서 그분처럼 멋진 본보기를 보여주셨던 분은 없었다. 팀장님은 회의 할 때도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게 도와주셨던 좋은 선배였다. 불합리했던 상황 속에서 비판하며 맞서기도 했고, 한숨 쉬고 있는 나를 보시며 ‘그럼에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는 진짜 선배였고 나에게 멋진 어른이었다.
<일하는 사람의 생각>에서 광고인 박웅현은 이렇게 말한다.
월급 받으려고 다닌다는 마음으로 회사에 가는 사람과, 월급 받으려고 다니는 건 맞지만 회사에 가면 그 선배와 일하는 게 진짜 재미있어, 하면서 회사에 가는 사람은 완전히 다른 퍼포먼스가 나온다고 봐요. 그걸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느냐가 ‘즐겁게’라는 단어의 핵심일 거예요. (p.251)
<일하는 사람의 생각> 은 광고인 박웅현과 디자이너 오영식, 그들이 겪은 창작과 비즈니스에 관한 대화를 엮은 책이다. 창작과 브랜딩에 관한 생각을 나누기도 하고 그들의 일과 관련된 것들, 클라이언트나 환경, 직장생활에 대한 경험을 나누기도 했다. 내가 했던 일-설계, 인테리어-도 창작이고 창작을 하기 전에 클라이언트가 있어야 하며, 혼자서 할 수 없는 협업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대화가 더 깊숙이 와 닿았다.
함께 일했던 많은 분들을 하나씩 기억할 것도 없이, 한 권의 책을 읽으며 나는 팀장님을 계속 떠올리고 있었다. 일이 너무 많아서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를 때에도, 동 시간에 여러 현장에서 시달리고 있을 때에도, 에너지를 너무 많이 써서 방전 돼버렸을 때에도, 바쁜 와중에 꼭 해야 할 개인적인 일을 하지 못할 초조할 때, 다행히도 팀장님이 계셨다. 막막해도 웃으면서 일할 마음의 여유라도 있었고 결국 우리는 즐겁게 마무리 했었다. 그래서일까,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장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도 나와 같이 일한 후배들에게도 팀장님 같은 선배가 되고 싶다. 함께 일 할 때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 극한의 상황이 찾아와도 함께하는 이들이 있어 웃으며 일 마무리 할 수 있다는 것도 같이느끼고 싶다.
나에게 진짜 어른이 되어준 멋진 선배를 만나서 다행이다.